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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회원(소현세자비 강빈묘소)

하정초원 2022. 10. 31. 14:22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제357호)     '광명 영회원'을 아시나요?

광명시 공식블로그에서
 

오래전에 광명시 구름산을 지날때 잠깐 들렀던 영회원, 그리고 중국의 심양에 갔을때에 비운의 소현세자와 강빈에 대한 생각에 마음아파 한적이 있었다, Ignorant 군주의 아들로 태어나 적국의 볼모 신세가 되었고, 애비의손에 죽임을 당한 소현과 강빈이 볼모지에서 익힌 글로벌한 식견으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면 이조후기에 어떤세상이 되었을까?......

 

그간의 아쉬움을 광명시의 블로그 와 연합뉴스의 기사를 보게되어 기쁘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57호' 광명 영회원은 광명시 노온사동 구름산 자락에 있다.

조선 제16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 비 '민회빈 강 씨'의 원으로 조선 왕실의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민회빈은 우의정 강석기의 딸로 강감찬 장군의 19대 손녀이다!

 

1627년에 세자빈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 8년을 지내다 귀국 후 세자가 죽자 모함을 당하여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폐서인 신분으로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무고함이 판명되어 복위되고 복원 묘를 만들어 '민회묘'라 부르다가 고종 7년인 1903년 '영회원'으로 높였다.

 

 

 

그 후, 2011년(8월 22일 자) 문화재청 고시에 따라 '광주 영회원'에서 '광명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묘역의 시설은 봉분, 혼유석, 장명등, 석양, 석호, 문인석, 석마 등이 있으나 재실, 홍살문, 비석과 정자각은 남아있지 않다.

 

민회빈은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다. 적극적인 면모를 가졌던 강빈은 심양 볼모생활 8년간 심양관(식솔 200여 명)을 잘 운영하여 귀국할 때 많은 재물을 가져왔을 만큼 경영 수완도 뛰어났다고 한다!

 

몇 년 전 영회원 보존 관리를 위한 공사로 이곳 영회원이 넓게 확장되어 철제 울타리가 이중으로(원 경계 울타리와 묘역 주위 울타리) 설치되고 입구는 굳게 닫혀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수령이 약 400여 년 된 광명시 제1호 보호수인 큰 느티나무도 들어가는 입구를 철제 울타리로 막고 시건장치를 해놓아 출입이 안된다.광명시 문화 관광과 전통문화팀 관계자에 따르면, '광명 영회원'은 '문화재청 궁능 유적 본부 조선왕릉 서부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출입하려면 '공개 제한지역 출입 신청서'를 조선왕릉 서부지구 관리소에 제출 후 승인(처리 기간 20일)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출입 신청서를 제출 후 담당자와 수차례 통화 시도 끝에 연결되었다. 약 4일 만에 담당자 연락을 받고 8월 24일(월) 11시에 영회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선왕릉 서부관리소 영회원 담당자'와 함께 '광명 영회원'을 들어와 보니, 주 출입구를 지나 한참을 걸어가도 묘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원내 부가 많이 넓어지고 잘 정리되어 있다.언덕을 계속 올라가니 저 앞 높은 곳에 묘역이 보인다! 가까이 가니 연녹색의 철제 울타리와 시건장치가 달려있는 입구가 또 있다.

언덕 위로 오르면서부터 외부인 출입 감지가 되었는지 요란한 경고 방송(접근하지 말고 나가라는)이 계속 울리고 있다!최종 출입구를 들어서니, 조선능원에서 익히 보던 형태의 능원 모양으로,

 

양옆과 뒤는 나지막한 기와 담장으로 둘러지고 앞쪽과 봉분 사이에는 문인석, 석등, 석마, 석양, 석호 등 각종 석물들로 봉분을 지키고 있다.한동안 관리가 부실했던 강빈의 원이 제대로 관리를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구름산 누리 2길(둘레길)을 걸으면 영회원 표지판과 영회원 쉼터 정자를 만나게 된다. 둘레길을 벗어나 영회원 정문을 지나 범안로 근처에는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구름산에서 유입되는 물을 저수하여

957년 제방 형식으로 준공된 '노온사 저수지'는 '애기능 저수지'로 많이 불리고 있다. 현재는 낚시터로도 사용된다.광명시민들게는 '애기능'이라는 명칭도 '영회원'만큼 익숙하다.

 

 

강빈의 친정아버지 강석기는 인조반정 후 동부승지, 우의정을 지냈다. 묘소는 영회원 과 가까운 금천 강 씨 문중 묘역의 내강에 자리하고 있다.

'광명 영회원' 가는 길은 밤일 음식문화거리 범안로 따라 노온 정수장을 지나 애기능 저수지 옆길로 들어가서 안내판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구름산 둘레길에서 내려와도 금방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시아버지인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강빈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제주로 유배된 뒤 어린 나이에 죽었고, 강빈의 친정마저도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이곳 '광명 영회원'은 강빈의 친정 선산이었다.

 

한편, 영회원 출입제한을 광명시청에서 한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으므로, 이기회를 빌어 문화재청에서 법령에 따라 공개 제한구역으로 지정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사적 제357호 '광명 영회원'은 금천 강 씨 강석기의 둘째 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세자빈이 되었던 강빈(민회빈 강 씨)이 왕실 묘역에 묻히지 못하고 친정 선산에 묻힌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부군인 소현세자는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경역 '소경원'에 모셔져 있다!

 

광명 영회원'은 문화재청에서 재 정비 후 비공개 문화재로 지정하여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공개 제한지역 출입 신청서'를 '조선왕릉 서부지구 관리소'로 제출 후 승인을 받고 담당자와 동행해야 출입이 가능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명칭인 '애기능'의 유래를 잠깐 살펴보면, 강빈이 세자빈으로 들어간 후 친정집에서는 어린 나이에 시집간 딸을 '애기씨'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불쌍한 애기씨가 잠들어 있다"하여 '애기능'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강빈에 대한 평가는 점점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궁중 잔혹사, 꽃들의 전쟁'은 강빈을 주제로 삼고 있다. 또, 드라마 '삼총사'에서도 소현세자와 강빈이 등장한다.

광명시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오리 이원익 대감'과 '강빈'을 들 수 있기 때문에 '강빈'을 재조명해서 광명의 인물로 널리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편, 광명시는 고려 때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광명시 온라인시민필진 다니엘(구본용)님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brkuu

소현세자 청나라 볼모 생활, 370년 만에 재조명

 

선양 총영사관 주최 한·중 국제학술제 개최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비운의 세자'로 불리는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8년을 생활했던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현지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학술행사가 열렸다.

 

한·중 학자들은 22일 주선양 한국총영사관이 주최한 '제1회 사행단 문화축제'의 주 행사로 열린 국제학술제에서 소현세자의 선양 생활과 역할,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 5년(1627) 정묘년, 조선에 들이친 청은 9년 뒤인 인조 14년(1636) 병자년에 두 번째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했다.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 달가량 항전하다가 삼전도로 나와 땅에 머리를 9번 찧는 의식으로써 항복했다.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청은 당시 수도였던 선양으로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뒷날의 효종) 등을 볼모로 데려갔다.

 

힘없는 조국과 비극적 운명을 같이한 소현세자는 1637년 4월 선양에 도착, 청이 명에 승리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한 1644년 겨울까지 무려 8년간 볼모 생활을 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김남윤 연구원은 "병자호란 직후 청이 소현세자를 비롯해 3정승 6판서의 자제까지, 많은 인질을 선양으로 끌고 간 것은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명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 병력을 조선에서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조선과 사대관계를 맺은 청은 약조 이행을 촉구하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고 모든 사안에 대해 소현세자에게 먼저 말하고 장계(狀啓)로 조선 조정에 알려 실행하게 했다"면서 "소현세자는 대청(對淸) 외교의 최전선에서 청의 강압에 응대하면서 어떻게든 조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고 김상헌 등 청에 투옥된 척화신들을 보살피려고 애썼다"고 덧붙였다.

 

산둥대 천상성(陳尙勝) 교수는 "당시 청 황제는 소현세자를 여러 방면에서 우대해 청에 호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참관하게 하는 등 일종의 압력을 가해 명을 돕고 청에 반대하는 조선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려 했다"면서 "이는 결과적으로 소현세자가 부친인 인조의 의심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8년간 볼모 생활을 견디고 1645년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장기간 청에 머물며 '친청파'가 됐다는 소문과 청이 조선왕을 자신으로 교체하고 인조를 대신 선양에 오게 할 것이라는 모함 탓에 인조의 냉대를 받아야 했다.

 

아들을 의심한 인조는 귀국한 세자가 군신의 예를 보이려 하자 이를 거부했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다. 소현세자는 결국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소현세자는 결국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일각에서는 부친인 인조 또는 정적들에 의한 '독살설'을 주장하지만 오랜 볼모 생활로 지병인 학질이 악화해 숨졌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서울대 이상찬 교수는 "당시 선양에 들어간 소현세자 일행은 문·무관과 역·의관 등을 합쳐 182명이었는데 청은 경비 부담 때문에 인원 감축을 요구하기도 했다"면서 "소현세자가 머물던 선양관소(館所)는 청군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에 대한 대민지원을 비롯해 오늘날의 영사업무 창구까지 겸하면서 경비가 늘 궁핍했다"고 설명했다.

 

소현세자가 생활했던 선양관소는 현재는 아무런 표지나 흔적이 없고 당시 사료들을 토대로 대략의 위치만 추정되고 있다.

 

smj@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