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곳은 고잔의 박사집 바로 옆집이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집안에 잔병이 많다하여 댓골이란곳으로 이사를 했다, 즉 고잔에서 뱅기댁을 지나고, 한터를 지나면 "댓골"이 닿는다. 국민학교 가기전(기억할수 있는 나이)에는 뭐하고 놀았을까?, 밥만먹으면 30여분 걸리는 염전에 가서 소금만드는것을 보았고, 인부들의 간식(주먹밥)을 얻어먹고, 휘발유냄새 향긋한 제무시 (GMC)차량을 보는것과, 염전주변의 행이나무(함초)사이의 개깽이(바다새)의 알을 줍는 일에 유년기의 모든것을 보냈다.
특히 염전 한가운데는 조그만 섬이 있어 몇가구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을 똥섬 이라고 불렀다, 원래 그곳은 한터(큰집)와 연결되었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무슨?맥을 끊는다하여 신작로와 염전 수로를 만들어 고립된 똥섬이 되었다한다.
염전이 더우면 상구집 은행나무 강당에서 놀다가, 글방(서당)에 가서 글읽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느덧 자라 국민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굉장히 멀었다, 엄마와, 동무,동무엄마 넷이서 입학식에 갔다, 가슴에 꾀죄죄한 손수건을 달고서, 낡은댓골을 지나, 증말을 넘어 부곡리 헌학교로 갔다, 헌학교는 초가지붕을 한 학교로 6학급의 조그만 학교로 심훈선생의 집필지임을 청소년기에서 알게 되었다,
머지않아 양옥으로 지어진 한진국민학교로 이사(이전)를 가고, 다시금 상록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자, 이제부터는 영역을 넓히면서 본격적인 놀이문화에 젖어든다, 우선 봄이오면은 앞산뒷산이 다 내 놀이터다, 이젠(컸으니까) 앞산뒷산의 구별이 없다, 칡뿌리캐기, 잔대캐기 꿩알,오리알꺼내기, 작은 가그머리(때까치),종달새알도 께내 대파속에 넣어 구어도먹고, 쪄서도 먹는다, 그뿐이랴, 찔래순, 소나무순, 아카시아꽃등 못먹는것이 없었다.
봉울미, 남산, 용골, 달분재,의 산등성이는 모두 내놀이터 였다. 특히 봄철 생선장수 아주머니의 커다란 광주리안에는꽃게,준치,삼치,밴뎅이,강다리,새우등 엄청많은 생선들이 갈잎(도토리나무잎새)에 덮혀있다, 안섬, 한진, 동양말에서 오신 아주머니들이다.
여름이오면 놀이터는 아에 바다 한가운데로 간다,바다가 보고프면,염전을 지나 저수지에서 수영을 한다, 물론 개헤엄이지, 날씨가 좋으면 최고이고, 우린 비가와도 헤엄을친다, 옷은벗어 행이나무에 둘둘말아 갯벌을파고, 그속에 옷을넣고, 개흙을 물에 적혀 쌓으면 아무리 비가와도 옷이 젖지 않는다, 3 ~4 M의 수문꼭대기에서 4~5M의 물속으로다이빙도하고, 비록 개헤엄이었지만 얼마든지 멀리갈수가 있었다,
그리고 뚝(제방)넘어가면 엄청커다란 뻘이있는 바다가 나온다, 물이 나갔을때는 갯골에서 미끄럼을 탄다, 굉장히 긴골이라 놀이에는 최고다, 그러다가 싫증이나면 가재잡고, 밤게잡고, 민챙이(골벵이) 맛조개등 을 잡고, 또한 망둥이 낚시에 하루종일 보내고 집에오면 얼굴은 새까맣고, 머리에는 개흙이 그대로이고,,,,야단맞고,,,, 다음날에는 도랑물을 퍼내고 물고기를 잡는다, 바가지와 얼맹이(체) 들고 물을푼다, 커다란 꺼먼붕어(참붕어), 모치(숭어중어),동어(숭어치어), 뱀방어, 털게(민물게)들 잡아 배를따고(요리하기좋게) 집에온다, 엄마하는말, 온몸이 흙이고 비린내야,,,,,이놈아,,또 야단.
학교에 간다, 그런데 한진에 정박한 미군군함이 있어 연일 커다란차(도져,클레인,대형트럭, 트레일러) 와 탱크,포차들이 신작로로 지나가면서 굉음을 낸다, 쉬는시간이면 신작로(학교가 신작로에 붙어있음) 로 나가 멋진 차와 하얀미군,까만미군들을 구경한다, 모두다 처음보는 것들이다, 참 신기하다.
공부가 끝나고 동무들이랑 미군배가 정박해 있는 한진으로 간다, 그런데 자기것도 아니면서 그 동네에 사는 동무들은 내가 보는것을 못마땅해 한다, 정말 웃긴다, 우리반에 복길이란 동무가 있는데 한진에 산다, 그래서 함께 한진에 가보곤 했다, 엄청큰 배가 정박해 있었다, 배안에서는 커다란 차량과 탱크들이 들어가고 나오고 있었다, 어찌 배가 차를 실고 다닌담, 정말이지 커다란 충격이었다.
미국사람들이 배에서 나와 뭐라고 중얼거린다, 바로그때 복길이는 그들에게 말을 한다, 헤이, 기브미 초코렛,,,,, 희얀하다, 복길이가 영어도한다,,,,,. 그리고 미군들이 먹다가 던진 담배(담배껌),우유(팩우유) 초콜렛봉지등이 있으면 잽싸게 달려가 주어와서 입에 털어넣곤 했다, 그런데 내용물은 다먹고 빈 껍질만 던진것이다, 그걸 줍는것을보고 웃는 까만미군의 하얀 이빨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진과 안섬은 항구다, 특히 한진에서는 인천가는 여객선도 있었다, 그리고 북한 옹진에서 피난온 사람 들이 많았다, 말도 이상하고 억척스러웠다, 생선장수들은 모두 옹진사람들이었다, 너무 가난해서 집도 판잣집이었고, 땅은 없고, 남의집 배를타고 연평도에 나가 조기도잡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연평도 조기를 잡으로갈때나, 풍어재를 지낼때는 정말 장관이었다, 왕소나무숲속의 무서운 당집 에서 제사상을 차려놓고, 빨강,노랑,초록,파랑색의 천을 걸고, 배(풍선/돛을 이용하는배)에도 여러깃발을 달고 꽹가리(사물놀이)를 치며 몇일을 기원한다, 그러나 가끔씩 풍랑에 죽는사람, 북한에 끌려간사람들이 있어 온동네가 울음바다가 되곤 했다.
국민학교는 아직 졸업생이 없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각 한반씩 있었다, 체육시간이 되면 모두다 신바람이 난다, 체육이 아니라 놀음 이었다. 우리1학년들의 키를보면 웃음이 난다, 형아같은애, 누나같은애, 자기동생은6학년인데 자기는 우리와 한반이고, 나이차이가 많이 났다, 나는 7살에 갔으니까 제일 어리고 나머지는 모두 형아,누나였다,나는 항상 키가적어 물당번이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자 변도(도시락)을 꺼낸다,40여명중 10여명은도시락이 없다, 도시락이라도 깡보리밥도시락,수제비도시락이다,퉁퉁불은 수제비를.....그러나 반찬만은 최고다, "박대조림. 실치조림, 조기, 삼치,등등,,,,,
여름 방학이다, 방학동안 은행나무집 뒷산으로 아침마다 모이란다, 6학년 형이 인원을 체크하고 안온사람은 이름을 적는다, 이것이 바로 "조기회"란다, 간단히 체조도 하고 주변 청소도한다, 달리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 나온 동무들의 얼굴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개시바리걸릴눈(눈병), 기계총걸린머리(머리병), 후발총 (목뒷덜미 종기),그리고 강굴같은 코, 새까막한 목때, 뚫어진 검은고무신, 등등,,,,,,. 아마도 이것이 새마을 운동의 시초가 아닐런지?
밤이면 삼베껍질을 벗긴다, 마을 공동으로 삼베나무를 베어 드럼통에서 삶아 여름내내 껍질을 벗긴다, 벗긴 나무는 하얗고 멋져 매미채를 만들어 매미, 잠자리등을 잡고 했는데, 그 삼베잎이 대마초라나? 청년이 되어 도시로 갔을때에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 밀집방석 깔고, 쑥으로 모기불을 놓고, 맛조개와 호박넣은 칼국수 를 먹고,,,, 이슬이 내릴즈음 엄마한테 야단맞고 방에 들어가곤 했다. 그때엔 북두칠성이 유난히도 밝았고 반딧불이도 엄청 많았다.
난 늘 기신이와 같이 집에온다, 백토캐는 고개를넘으면 질그릇을 만드는 마을이 있다, 가마가 2개 있었는데 우린 이곳을 증말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많은 옹기장사들이 옹기를 사러왔고, 초가로된 신교당(천주교 공소) 이있어 사람마다 미국이름(영세명)으로 부르곤했다, 나는 할머니가 매우 사랑했는데 잔병이 많아 수양어머니 를 두어야 한다고 해서 증말에 계신 안나할머니를 수양어머니로 삼아 엄마처럼 부르도록하였다, 그분은 정말 아들같이 사랑해주셨고,,,,, 그러나 사춘기되면서, 서울로 학교가는 바람에 소원해지고, 결국 멀어지고 만것이다, 할머니가 맺어준 소중한 인연을 내가 버린 아둔한 사람이 되었다.
가을이다, 가을이 오면 풍성하다, 우선 우리학교 밭에서 고구마를캔다, 여름내내 우리가 물주고 풀매고 가꾼 결실이다, 물론 나는 키가작아 키큰동무들이 많은 일을한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면 소사(일하는사람)가 옥수수죽을 쒀서 주는데 정말 맛이있다, 4학년까지는 우유가루를 주고, 5학년때부터는 노오란 옥수수 가루를 주었다, 미국이 한국어린이를 위한 원조물자가 아니었을까? 그때는 참 어려운 시절이었지,
단수수깡을 빨면 아주 맛있는 단물이 나온다, 그리고 밥솥에 찐 수수는 한알한알 빼먹으면 맛이 최고다, 콩을꺽어 구어먹는 콩사리도 재미있고, 감나무에 올라 빨간홍시도 마음대로 먹었다, 그리고 집안 시제(제사)철이 오면 우리 성씨들은 다 모인다, 할아버지들, 아저씨들, 형아들. 그리고 나같은 애들, 수십명이 모여 묘지마다 돌아다니며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그제사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우리반 애 조학규 아버지다, 음식이 어쩼다면서 할아버지들이 야단을 치는데, 동무아버지는 미안해하며 어쩔줄을 모른다, 왜 할아버지는 동무아버지에게 야단을 쳤을까? 그때는 통 알수가 없었다.
제사가 끝나면 맛있게 떡과 과일을 마음껏 먹고, 남는 음식들을 한꾸러미씩 싸주면 집에 가져와 엄마와 누나한테 준다,,, 참 이상한것은 왜 엄마나,누나, 여자들은 제사에 오지못하게 하는지? 그리고 학교에 가니 그 동무(제사상차린 집 아들)이 너네집은 양반집인가봐, 부자이고,,,하면서 부러워하던 그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겨울이되면, 우린 댕댕골로 간다, 그곳에는 춥긴하지만 논이 많아 썰매타기가 최고다, 집에있는 톱, 낫, 자귀(손도끼)는 썰매, 팽이만드느라고 무뎌지기 일수, 아버지한테 매일 야단맞는다, 물통테를 벗겨 외발썰매를 만들어 댕댕골에서 신나게 탄다, 싫증이나면 불놀이하고, 쇠똥에 불을 붙여 놀다보면 양말태우고,,그나마 수렁에 빠지면 벌벌떨고 집에간다,,,,, 또 야단맞고,,
뒷산에가서 자라는 소나무 모가지만 짤라 팽이만들고, 옆집몰래 대나무짤라 연만들고,,,,정말 먹는 것 별로없이 없이 겨울철을 눈과 얼음으로 지내다 보면 어느덧 봄이 오고만다, 그런데 6학년 겨울방학,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중학교 갈 놈은 과외공부를 해라," 하신다, 야 웃긴다, 방학은 놀아야 하는것인데 학교와서 공부해라, 말도 안되지, 그리고는 엄마한테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신나게 놀기만했다.
그런데 우리동네에는 이상한 일들이 자주 발생하곤 했다, 윗집 상옥이 아버지는 술만먹으면 동네밖 에서부터 고함을 지르고 집에와서는 애들과 아주머니를 때려서 상옥이와 아주머니는 우리집으로 피신을 온다, 그리고 밤이깊어 집으로간다, 건너집 아저씨는 놀음(화투)를 좋아한다나, 돈을 잃었다고 아주머니랑 매일 싸움이고, 옆집 순자누나는 바람이 났다면서 자기오빠가 머리를 빡빡깎아서 밖에도 못나가고, 어떤 아저씨는 술김에 농약을 마시고 죽었다나,,,,, 이상한일도 참 많았지.
그러나 재미있는일도 많았지, 추석, 설날,보름날, 이월초하루, 그리고 농사철에는 온동네가 잔치였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하는 풍물놀이(사물물이)는 진짜 멋지지, 우물에가서 "주왕님,주왕님,물주쇼, 물주쇼" 하는 말을 그때는 정말 몰랐었지, 아마도 우리마을은 가믐이 두려워서인지 물을 특히 좋아헀어, 물을 다스려야 애들이 샘에빠지지않고, 어른들은 뱃일중에 바다에 빠지지 않는데나......
그날은 무척이나 추었지, 점심으로 고구마를 쪄먹고, 놀다가 집에왔는데, 사랑방에는 아버지가 자리(왕골로만듬)를 짜는 고드래 소리가 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 이웃동네 영철이네 아버지를 만났는데 요새매일 학교에서 과외공부를 한다더구나, 너는 안하니?
영철이는 친척들이 인천에살고 있어 우리반에서 혼자만이 가죽가방을 메고 다녔다, 그리고 인천자랑을 하도 하여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했었다, 또 그놈때문에 아버지한테 야단맞는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아바지 하는말씀, 그레, "거짖말하고, 놀기만 하는놈, 졸업하면 논일이나 하지" 그말씀에 몇일 더 놀다 학교에 가기로 한다, 남산미에가서 토끼몰이도 하고, 동네 글빵에가서 천자문 공부도하고, 썰매타고, 연날리고, 팽이치고,,,,
입시철이 왔다, 물론 공부도 안했으니 걱정될 일도 없고, 중학교 가기도 싫고 그져 글방이나 다니고 조금 더크면 이발소에서 일하든, 힘이생기면 나도 칠성이 처럼 배를 타면 될것이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서울 갔다오시면서 일류 중학교 입학원서를 가지고 오셨다, 다들 자기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몰라도 그런욕심이 생길줄이야,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서울 서대문지나 신문로 근처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이 천재들만 모이는곳이라나,,,, 그런데 학교 문앞에는생전 보지도 못하던 세단(차)들이 엄청 많더라, 아픈 추억으로만 남기고, 다시 돌아와서 놀기에 열중하는데, 기신이형님(그때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다)이 지나가며 학교에 가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나, 그래서 처음으로 면내에 있는 똥통중학교라도 보내달라고 해서 그것도 시험이 끝난뒤 뒷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것도 공부못하는 열반에 배치된것이라,,,,,하지만 그래도 40여명 국민학교 친구중에 5사람만이 중학교에 가게 되었지,
중학교1학년때, 비로서 다른면에도 가보고, 다른동네 친구들도 사귀었지, 성구미, 뒷꾸지, 노란이.큰덕미,작은덕미, 제비골, 나루머리, 궝말, 다리실,세비재등 마을 주변의 모든 골과 산들머리를 다니게 되었지, 학교가 너무멀어 차를 타거나 걸어서(2시간반걸림)갔는데, 그놈의 차는 아침1대만 가는데 사람이 너무많고, 생선들을 실어서 냄새도 나고 해서 나는 용감하게 걸어서 다녔지,
중학교1학년 방학때면 중학교에 안간 1년선배들과 나무하러 산에도가고, 소돼지 먹이풀도 베러 논 한가운데도 갔었지, 풀을베기 싫어서 남의집 모(벼의 어린것)를베서 혼이난적도 있었고, 선배들을 따라 용돈벌이 실뱀장어도 잡았고,,, 그런데 원(작은제방)막는데 흙을 지게로 나르면 돈을 준다하기에 선배들과 같이 갔었는데,,, 그것이 말야, 지게에 흙을 담고 일어설려고 하니까 도저히 일어날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넵다 집어던지고 그냥 집에 왔지. 내모습을 보고 엄마가 하시는 말씀,"지게질은 아무나 하니? 공부나 열신히 하려므나,,,, 하신다.
논을건너서, 서낭댕이를 넘고, 다리실을 지나, 제비골 과 그 높은 세비재를 올라서 등하교를 하는데 꼬박 왕복5시간이 걸리지, 가면서도 보리수, 산딸기등을 따먹으면 몇시간이 더 걸리니 무슨놈의 공부를 했을까? 내가 서낭댕이까지 가는동안, 아니 내가 안보일때까지 30여분을 사랑토방에서 바라보는 눈이 있었으니, 바로 멀리계신 우리 어머님이시다, 그이후, 서울로 공부하러가게 되었고 늘 집에 왔다 갈때는 토방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느덧 세월이 흘러 군에 가게되었고, 휴가마치고 귀대할때나, 결혼후 처자식을 데리고 왔다가 갈때도 늘 똑같은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내 뒷모습을 보시고,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그리고 세월이 흘러, 90세가 넘어서, 눈바람이 휘몰던 어느겨울날 똑같은 토방에서 무엇을 바라보다, 아주 멀리 가셨다, 도데체 누구를 기다렸을까? 누구의 뒷모습을 보고계셨을까?
중국 현대소설의 대부인 주자청의 "배경" 의 한장면, 다떨어진 옷차람에, 헬쓱한 몰골을 하고 아들에게 줄 긴식거리를 사러 사람들을 헤집고 내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기차안에서 바라보는 아들,,,,또한 기차 창에 비친 ,미지의 세계로 떠나가는 불쌍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언젠가는 나의 뒷모습도 우리 애들이 보지 않을까? 그 토방의 어머니 뒷모습을 이제와서 너무늦게 조금이라도 헤아릴수 있을것 같습니다.
내고향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