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묘소를 찾아서~
얼마전, 권비영님의 '덕혜옹주'란 책을 읽은 그녀가 덕혜옹주의 묘소엘
가보고 싶다는 이야길 꺼냈다. 소설속에서 묘소의 위치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 근처에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며, 꼭 한번 다녀오고 싶다는 이야길 한 것이다.
홍릉은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제26대왕 고종 임금의 능으로
바로 덕혜옹주의 아버지가 되시는 왕이다.
내가 살고 있는 구리시와는 무척 가까운 곳이어서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예전에 두어번 들러본 곳이기도 했다.
드디어 이번 일요일 그녀를 데리고 덕혜옹주 묘를 찾았다.
구리시에서 버스를 타고 금곡역 앞에서 내려서 백미터 정도를 걸어 내려오자,
홍릉으로 들어가는 길목과 함께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 속의 유릉은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순종의 능으로,
아버지의 능인 홍릉의 바로 이웃에 있다.
이정표를 따라 백미터 정도를 더 걸어 내려가면
금곡동사무소가 나오고 그 뒷편이 바로 홍릉과 유릉의 능역이다.
동사무소를 지나면 T자형의 길이 되는데 좌측은 홍릉의 정문, 우측은
덕혜옹주의 묘소로 올라가는 길이 된다.
우측길을 따라 가자, 드디어 안내판이 보였다.
덕혜옹주의 묘까지는 꽤 먼거리인듯 해 보였다.
날씨는 맑고 햇살은 눈부셨다.
살짝 더위가 느껴질 만큼 화창한 봄날의 오후였다.
고갯길을 넘어가자, 가로수가 울창한 길이 나타났다.
좌측 담장은 능역을 보호하는 담장으로, 이 길은 시민들의 산책로겸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애용되고 있는 듯 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담장 위로 제비꽃 한송이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겁도 없이 황제의 능을 둘러싼 담장 위에 올라가 꽃을 피우다니..
옛날 같으면 넌... 그냥... 암튼 그랬어ㅎㅎ
그 담장 너머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였다.
조선시대엔 왕의 능역으로 지정이 되면 사방 십리 안의 묘를 모두
이장해야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입도 제한 되었을 테니, 그래서
왕릉 주변은 모두 울창한 숲이 저절로 조성 되었을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자, 기와집과 함께 표지판이 나타났다.
'영 원'이라는 묘역을 설명하는 표지판이었다.
조선시대엔 왕실의 묘를 부르는 명칭이 달랐는데,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나 그 비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황태자 자리에만 머물렀던 이은 공의
묘소엔 '능'이라는 호칭이 아닌 '원'이라는 호칭이 붙은 듯 했다.
'영 원'은 고종의 세째 아들 의민황태자와 우리에게도 이름이 낯설지
않은 그의 비(妃) 이방자여사의 묘소라고 한다.
'영 원'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기와집으로 아마 재실인듯 했다.
마침 밖에서 청소를 하고 계시던 어떤 노인분이 설명해 주시기를
내일(양력5월10일)이 바로 제삿날이어서 황실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것을 대비해서 지금 청소도 하고 주변을 새단장 중이라는
이야길 들려주셨다.
묘소앞에 세워져 있는 홍살문과 침전.
왕릉에 비해선 그 규모가 훨씬 작아 보였다. 묘소는 소나무 숲에
가려서 보이질 않았다. 출입이 통제되고 주변은 모두 철제 울타리가
둘러 쳐져 있어서 울타리 너머에서만 구경을 할수가 있었다.
'영 원'의 침전을 가까이에서 바라 본 사진
홍살문 앞 은행나무에서 가지 하나가 홍릉을 향해 뻗어 나와 있었다.
11살에 일본으로 끌려가서 두려움과 그리움으로 평생을 살았을 의민황태자...
죽어서 겨우 아버지 가까이에 묻혔지만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은 멀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 가지는 그런 황태자의 마음을 헤아린 것은
아닐까......!
다시 덕혜옹주의 묘소로 향하는 길, 길옆엔 하얀 꽃이 흐드러진
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자, 드디어 덕혜옹주의 묘소임을 가리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여전히 철제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어서
먼 발치에서만 묘소를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카메라로 비석을 줌인 해보니 '대한덕혜옹주지묘'라는 한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덕혜옹주의 묘가 확실했다.
묘앞엔 석등이 하나 서 있었고 묘는 그저 아담하고 소박해 보였다.
나는 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덕혜옹주의 쓸쓸하고도 비극적인
삶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녀의 불행은 그녀가 망국으로 치닫고 있던 조선의 황녀로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로도 바꿀 수 없었던
비운의 운명을 가진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을까...
폭포같은 슬픔과 바위같은 그리움을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살지는 않았을까...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이 되던 해에 태어난 고명딸이라고 한다.
늦게 얻은 딸이어서 고종이 애지중지 옹주를 키웠다고 한다.
그녀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아마 이때가 전부였을 것이다.
고종이 승하하셨을 때 옹주의 나이는 여덟살이었는데 이후로
일제에 의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녀 역시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죽어서야 겨우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움이 홍릉의 담장을 타고 넘기엔 그녀의 한이 너무 지쳐버렸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묘소 옆으론 붉은 철쭉이 무심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도 또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그 역시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덕혜옹주가 피지배자의 굴레속에서의 피해자였다면 그녀의 남편은
지배자의 굴레속에서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울타리 너머로 잠시동안 묘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역사의 부끄럽고도 수치스러웠던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황녀라는
신분만으로 꽃다운 시절과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덕혜옹주~
그녀를 추모하는 마음을 울타리 너머로 날려보내고 묘지를 떠나왔다.
이제는 편히 쉬세요.......!
덕혜옹주 묘소를 다녀온 뒤에 홍릉에도 들러 보았다.
그녀가 조선시대 왕릉을 구경해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릉이며, 유릉은 순종과
그의 두 황후를 합장한 릉이라고 했다.
홍릉으로 들어서자, 활짝 핀 왕벚꽃이 우릴 반겼다.
정문을 들어서서 좌측이 홍릉, 우측이 유릉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아름드리 나무 아래엔 하얀 제비꽃도 피어 있었다.
능앞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놓고
가족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연못가에서 아들과 함께 놀고 있는 아빠의 모습도 보였다.
홍릉앞의 홍살문과 침전 전경~
황제의 능이어서 그런지 다른 조선시대 왕릉보다 규모가 더 커 보였다.
명나라 태조의 능(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는 홍릉의 침전 전경.
침전으로 통하는 길을 '참도'라 칭하는데 가운데 길은
신만이 다닐 수 있는 '신도'이며 좌.우의 길을 임금이 다니는
'어도'라고 칭한다고 했다.
침전 앞에 세워져 있는 문무석과 여러 동물의 석상들.
석상 역시 다른 능에 비해서 훨씬 많은 듯 했다.
침전 전경~
사진을 찍기 위해 신도(가운데 길) 위에 올라서자, 그녀가 말린다.
하늘의 신만 다니는 길이래잖아 하면서ㅎㅎ
동물의 석상중에서 가장 무서워 보이는 석상~
무인석의 모습~ 조각은 정교하고도 아름다웠다.
홍릉의 모습.
홍릉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능을 호위하듯이
에워싸고 있었다.
재실 대문의 기와지붕 위에서 싹을 틔우고 있는 풀잎 하나...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듯 했다.
열두살에 왕위에 올라 재위 기간동안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와의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된 왕노릇 하기가
힘들었을 유약한 임금이었던 고종은, 그러나 밀려드는 외세의 침략속에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 어느 임금보다도 힘들고 괴로운,
격랑의 재위 기간을 보냈을 것이다.
만약 역사가 그에게 망국의 책임을 묻는 굴레를 씌운다면
그 역시도 억울함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까...?
이미 흘러간 역사는 다만 그 교훈으로만 삼을 일일 것이다.
이렇게 덕혜옹주의 묘소와 홍릉을 다녀왔다.
"저비스"님의 불로그에서 발췌하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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