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것들/인 연

김민기님을 추모하며....

하정초원 2024. 7. 31. 11:30

IMF전, 어느날 동료직원이 마케팅 지혜를 얻어보자며, 10여명이 단체로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대학로의 익숙한 소극장에서 '지하철1호선' 공연인데... 내게는 낯설고 희안한 장면이지만... 재미있고 역동적인, 또 우리들 삶이었다. 이때가 나의 뮤지컬공연 입문의 기회가 되었다.

 

관람후에, 동료의 소개로 극장주변의 h다방에서 김민기님을 마주한적이 있다. 공연의 총 연출을 맡으면서 깊은 고뇌와 상념을 느낄수가 있었던 짧은 만남이었다. 그 이후, 생활인으로 까맣게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다만 간간히 찾아들었던 "늙은 군인으...."라는 초저음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세대의 군생활을 추억하기도 했는데....

 

저녁뉴스 자막에 님의 부고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동시대의 고락을 함께한 사람으로써 고뇌에 찬 지식인의 넓은 가슴에 위로를 받았는데..... 허무한 상실감에  너무 슬프고 우울했다, 하늘의 별이되신 님의 뒷것일에 두팔두발 모두모아 조의를 표함니다,부디 삶의 패악질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소서...

 

김민기님 기사내용을 잊지않기위해 캡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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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가 갔다, 70년대라는 내 창의 커튼도 내려갔다”[부고]

  • 문화일보
  • 입력 2024-07-24 11:39

민기의 서울대 미대 회화과 후배이자 동향 친구인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가 24일 문화일보에 추모글과 함께 보내온 그림 ‘시절은 가고 노래만 남아’. 대학 시절 기타 치며 노래하던 김민기를 추억하며 그렸으며, 하단에 ‘저 멀리 보이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고’라고 썼다. 한지에 수묵채색, 81.5×34.5㎝. 박동미 기자



■ 서울대 후배 김병종 화백 ‘밍기형을 떠나보내며’추모글

“사방으로 퍼져나간 그의 노래
저항·투사로만 가두면 안돼
따뜻한 정서와 약자에 연민
그는 자유 들녘에 선 음유시인”


김민기가 갔다. 그와 함께 70년대라는 내 창의 커튼도 내려지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는 본인이 의도하든 아니든 간에 한 시대의 창(窓)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김민기라는 창을 통해 나의 70년대를 되돌아보곤 했다.

서울대 미대 선후배 사이였던 그와 나는 처음 공릉동 옛 서울 공대 연병장에서 만났다. 운동장 아닌 연병장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곳에서 교련실습이 열렸던 까닭이다. 우리들 스무 살 푸르른 청춘에게는 품새가 맞지 않는 교련복을 입고 패잔병처럼 어슬렁거리며 그곳에 모이곤 했다. 교관을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뒤돌아보니 하회탈처럼 웃으며 거기 밍기형(우리는 그 당시 김민기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이 있었다. ‘나 좀… 일이 있어서… 부탁해도 될까.’ 대리 출석 이야기였다. 그는 쉬운 말을 몹시 어렵게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웃으며 일어선 그는 그렇게 연병장 아닌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당시 교련학점을 못 받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밍기형이 어느 날 신입생 환영 행사에 불리어 나왔다. 그는 사람들 앞에 힘차게 걸어 나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주변이 온통 배밭이었고, 꽃잎이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 쑥스러워하며 통기타를 들고 엉거주춤 선 그를 향해 “친구! 친구!”가 외쳐졌고 그는 노래를 불렀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우리들의 70년대 또한 노랫가락처럼 흘러갔고 밍기형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그가 스무 살 무렵 만들었던 노래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마치 무슨 비밀결사의 부호들처럼 퍼날라졌다. 70년대를 훌쩍 넘더니 80년대 90년대 아니 시대를 넘어 거센 물결처럼 혹은 함성처럼 번져나갔다. 늘 뒤로 빠지기 잘하던 그는 어느새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있었고 때로는 투사와 전사의 깃발로 펄럭였다.
 
나는 좀 불편한 느낌이 들곤 했다. 분명 그의 남저음 속에는 저항의 몸짓이 있었으나 그것만이 다가 아니어서다. 그의 노래에는 곰삭아 우려낸 우리네 따뜻한 정서와 넉넉한 마음이 있다. ‘어두운 비’ 내려오는 세상도 해맑게 바라보려는 ‘아름다운 아이’의 시선이 있고 분노와 투쟁을 넘어 햇빛 환한 쪽으로 가려는 발길이 있다. 증오보다는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이 먼저였다. 병들어 누운 지 3년 된 부모를 두고 서울로 가야만 하는 사연이 있고, 집으로 돌아오는 늙은 군인이 있으며 꽃 없는 화단에 꽃을 피우려는 아이가 있다. 심지어 곧 죽을 늙은 개 ‘백구’에 대한 연민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못 집어내는 색채 언어가 있다. ‘새하얀 눈’ ‘붉게 떠오르는 태양’ ‘들의 푸르름’ ‘어두운 비’ ‘황혼에 젖은 산’….

허구한 날 실기실을 비운 미대생은 그렇게 언어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세계를 이룬 것이 사회적 상상력과 서사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한마디로 자연과 자유의 들녘에 선 음유시인이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김민기를 읽고 또 읽어낼 것이다. 부디 이 부분이 짚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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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선 넘은 김민기…"그래도 내 노래는 내가 젤 잘 불러"


중앙선데이
업데이트 2024.07.27 06:53

[특별기고] 내가 만난 고요한 거인 김민기

21일 별세한 김민기. 역사의 변곡점마다 영원히 불리울 ‘아침이슬’의 작곡가이자 가수,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 시대를 연 ‘지하철1호선’의 연출가, 생태주의적 생협 ‘한살림’을 만든 문화운동가였다. [중앙포토]

1996년 가을 쯤으로 기억한다. 이른바 신세대 문화의 메카로 떠오른 홍익대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대중음악 교양 강의를 맡았는데, 70년대 청년문화를 다루는 시간에 김민기의 음악사적 의미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300명이 넘는 학부생들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나는 학생들이 당연히 김민기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 것이라고 전제하고 ‘썰’을 풀고 있는데 수강생들은 ‘이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강의를 잠시 멈추고 물었다. “너희들, 김민기가 누군지 몰라?”

순간, 대형강의동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중간 열에 앉아 있던 장발의 남학생이 수줍게 손을 들면서 말했다.  “혹시, 드러머 김민기 말씀인가요?”

이 친구는 당시 꽤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헤비 메탈 밴드 시나위의 드러머 김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속으로 너무 놀랐다. 이들에게는 ‘아침이슬’이라는 고리를 말해주지 않으면 김민기가 아예 누군지도 모르는구나, 이제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와 나의 세대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이름이 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이름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도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한복판이라는 홍대 거리에서 말이다.

김민기는 내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제3공화국 시절에도, 그가 탄압받고 활동 자체를 금지당한 제4공화국 시대에도, 여전히 당국의 요시찰 대상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 제5공화국 시대에도,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제6공화국 시대에도 여전히.

음악평론가로 살면서 좋았던 딱 한 가지가 있다면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뮤지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점이다. 물론 차라리 아니 만났으면 좋았던 경우도 있지만, LP 재킷에서나 만났던 우상을 실제로 대면했을 때의 감정은 한 줄로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감동이다. 그 중에서 나의 10대와 20대를 가로지르며 그저 애호하는 대상이 아닌 존경스러운 인물을 만나는 것은 숨막히는 경험이다.

김민기와의 첫 조우는 음악평론가로서가 아니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공연 연출자로서 이루어졌다. ‘끝나지 않는 노래’라는 제목의, 갑오농민전쟁 때 산물인 ‘새야 새야’부터 80년대까지 한국 근대사의 노래들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공연이었는데, 이 공연의 초연이 1992년 당시 막 문을 연 대학로 소극장 학전 무대에서 펼쳐지게 된 것이다.

두어달 간의 장기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극장장인 김민기와는 대면할 기회가 없었고 마지막 공연날 거나한 뒤풀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내 어린 날의 영웅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저 꾸벅 인사만 건넸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수줍고 겸손했으며 한참 아래 후배뻘인 우리에게도 시종일관 말을 아꼈다. 그에게는 어떤 허식도, 이미 ‘역사적’이라는 형용어가 부여된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강력한 후광 효과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고요한 거인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그를 공식적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때나 그 이후에나 언제나 ‘뒷것’을 자처하던 그는 인터뷰를 거의 거절했는데, 나에게 그런 귀중한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술과 함께 자정이 넘도록 이어졌다. 이 인터뷰를 기점으로 나는 그냥 그와 소주를 대작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엄청난 애주가, 만취해도 흔들림 없어
술을 마실 때야말로 그의 진면목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주량이 엄청난 애주가임에도 소리가 높아지거나 흥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베이스 바리톤인 묵직한 그의 음성이 조곤조곤 펼쳐내는 이야기들은 그대로 역사적 야화이거나 미학 에세이였다.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기록해 두지 못한 내가 야속할 뿐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리 만취해도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없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객관적 거리를 두고 자신을 통제한다. 딱 한번 그 선을 넘은 거라면 어느날 대학로 뒷골목의 선술집에서 이렇게 호기를 부렸을 때였다. “야 있잖냐? 그래도 내 노래는 내가 제일 잘 불러.”

삼십년 넘은 음악평론가 생활 동안 딱 하나의 기억만을 챙길 수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1997년 겨울날의 그 위대한 이벤트(!)를 꼽을 것이다. 아이돌 문화의 열풍 속에서 잠시 침묵했던 가왕 조용필이 16집으로 화려하게 왕좌로 컴백했을 때, 나는 김민기와 술을 마시다가 문득 물었다. 조용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고. (조용필과 김민기는 1950년생과 1951년생으로 거의 동년배다.) 그는 별로 생각지도 않고 바로 응답했다.

“너 내가 조용필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할 줄 알았지? 아니야. 지하 형(시인 김지하)이 서대문 구치소에 있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노래를 듣고 감동했다고 했어. 나도 그래.”

사실 난 적잖이 놀랐다. 음지의 영웅이 지상의 가왕을 높이 평가하다니.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방배동에서 조용필과 술을 마시다가 또 불쑥 물었다.

“형님, 형님은 김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왕의 응답도 바로 튀어나왔다.

“김민기? 난 존경해.”
가왕은 횡설수설하지 않고 언제나 단문으로 정확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뭐 좋아할 순 있는데 또래나 다름없는 사람을 존경한다니.

“존...경이요? 왜요?”
“난 그 길이 어떤 길이든 일관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존경해야 된다고 생각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응답이 가왕의 입에서 나왔다. 이 두 사람은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순간도 스치지도 못한 사이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두 분의 만남을 제안했고 가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두 정상의 회담(?)을 주선하게 된 나는 생각을 많이 해야 했다. 만나는 장소는 어디서? 술값은 누가 내지? 등등. 그래도 한 살 위인 가왕의 동네에서 보기로 하고 술값은 주최자가 내는 것으로 합의.

약속날 나는 미리 대학로로 가서 김민기 형을 모시고 택시를 탔다. 반포대교를 넘어 방배동까지 가는 동안 김민기는 거의 말이 없었고 덩달아 나도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느닷없는 말,

“헌아, 오늘 술값은 내가 내는 거다.”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술값을 형이 왜 내요? 그냥 가만 계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리고 동네 횟집에서 시작된 술자리. 과묵한 두 거인은 안부 인사 말고는 묵묵히 소주잔을 비운다. 나까지 세 사람이 마신 술이 스무 병이 넘도록, 무슨 고승들의 선문답도 아닌데 조용한 방안의 공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가왕의 노래 미동도 없이 눈 감고 들어
김민기는 젊은 날 딱 한번 음반을 냈을 뿐, 대중 앞에서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다. [중앙포토]

그렇게 우린 겨울 한밤의 골목으로 나왔는데 그 이후의 계획까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대로 헤어질까 하는데 조용필 형이 가게의 불빛을 발견하고는 저기서 2차를 하잔다. 그렇게 들어간 동네의 후미진 카페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고, 가왕을 알아본 여주인은 방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양주를 한 병 내왔다. 그리고 첫 잔을 건배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 가왕은 방구석에 놓여 있던 노래방 기기 앞으로 가더니 번호를 꾹꾹 누른다. 가왕은  술자리에서도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 당연히 자신의 노래를 부를 줄 알았다. 그런데 흘러나온 전주는 놀랍게도 ‘아침이슬’!

나는 취기가 오를대로 오른 상태에서 그저 멍하게 노래방 반주에 맞추어 가왕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었다. 그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환영과 같은 상황이다. 김민기는 미동도 없이 그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물론 김민기의 답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듣고 당시 MBC 피디였던 주철환 형이 왜 자기를 그 역사적 현장에 부르지 않았냐고 질책했지만, 나는 그 전무후무할 영광을 남과 나눌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당연히!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아침이슬’이 세상에 나온 지 오십년이 되던 2021년, 나와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그리고 박학기는 헌정음반을 만들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리고 김민기의 반응 또한 예상한 대로였다.

“뭘 또 그런 쓸 데 없는 일을 벌이냐? 그런 짓 좀 하지 마라.”
이제 익숙해져서 그냥 그러려니 한다.

“아 이건 형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우린 ‘아침이슬’이라는 노래에 헌정하는 것이니깐.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계세요.”
이렇게 빨리 가실 줄 그땐 몰랐다. 그래서 살아계셨을 때 그 앨범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형님, 감사했습니다. 이젠 편히 쉬세요. 그리고 하늘에서는 가끔 노래도 좀 부르시고 그러세요.


강헌 음악평론가·소설가·명리학자. 1962년 부산생. 서울대학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음악대학원 졸. 저서로 『전복과 반전의 순간』 『명리』 등이 있다.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6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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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다"…세상 떠난 김민기의 흔적, 울릉도에도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4.07.28 08:00
업데이트 2024.07.28 09:11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지난 22일 세상을 떠난 고(故) 김민기 학전 대표가 만든 '내 나라내 겨레' 가사 일부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자 '내 나라내 겨레' 노랫말이 적힌 노래비도 주목을 받고 있다.

‘내 나라 내 겨레’ 새겨진 노래비
27일 경북도 등에 따르면 김민기 노래비는 경북 울릉군 안용복기념관에 있다. 2020년 8월 8일 ‘섬의 날’을 맞아 경북도와 울릉군이 세웠다.

‘내 나라 내 겨레’ 가사는 ‘보라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앞길에서 훤히 비치나 눈부신 선조의 얼 속에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 앞에... (중략)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등이다. 젊은이들의 맥박을 힘차게 뛰게 한 노래라는 평가를 받는 이곡은 김 전 대표가 작사하고 가수 송창식씨가 작곡했다.

 


당시 고인은 기념비 설치 장소로 독도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을 원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노래비는 안용복기념관 앞마당에 세웠다. 이곳에서는 맑은 날이면 독도가 맨눈으로 관측된다.

“음악 울릉·독도 위해 쓰여 영광”
하지만 노래비 제막식 당일, 폭우가 내려 김민기 대표는 울릉도에 입도하지 못했다. 노래비 설치를 주도했던 김남일 경북문화관광공사 사장(당시 경북도 환동해본부장)은 그 후 대학로 학전으로 찾아가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감사패를 김민기 대표에게 전달했다.

 


고인은 “내 음악이 아름다운 울릉도와 독도를 빛나게 하는 것 같아 영광이다. 우리의 섬과 바다를 지키고 가꾸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게 돼 기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김남일 사장은 “그가 남긴 음악과 메시지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울림을 주기를 바란다”며 “고인이 사랑한 자연과 음악의 혼이 깃든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는 것은 그를 추모하는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인은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후 동창생인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와 함께 포크 밴드 ‘도비두’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가수 양희은을 만나면서 시대를 바꾼 노래 ‘아침이슬’이 탄생했다. 1971년 발매한 정규 1집 ‘김민기’에도 수록됐다.

 


군사정권 저항정신 담긴 활동들
‘아침이슬’에 이어 ‘꽃 피우는 아이’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 고인이 쓴 노래 대부분은 ‘운동권 가요’로 불리며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가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해금됐다. 1984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결성해 프로젝트 음반을 발매했다.

1990년대에는 극단 학전을 창단해 학전블루(2024년 폐관)와 학전그린(2013년 폐관) 소극장을 운영해 왔다. 특히 소극장 학전에서 1994년 초연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지난해까지 8000회 이상 공연을 올리며 7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학전은 지난 3월 만성적인 재정난과 그의 건강 문제 등으로 33년 만에 폐업했다.


경주=김정석 기자 kihttp://m.jungseok@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6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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