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것들/인 연

고운님 보내면서.....

하정초원 2022. 11. 26. 18:58
한 삶을 살면서 무수히 얽키고 설킨 인연들....
모든 인연들은 항상 같이 있는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홀연히 떠날것이다.
여기 신비로움과 기적의 순간이 애잔함과 그리움에 잠시 머물지만 그또한
떠날것이다, memento mori!!

"나 기다린거야?" 막내딸의 눈물…그제야 엄마 심장은 멈췄다

중앙일보

업데이트 2022.11.25 10:03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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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앞둔 환자 곁을 지키다 보면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종종 겪곤 한다. 하늘에서,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 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준 것, 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일들 말이다. 혹자는 간절함이 이뤄 낸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폐암 환자가 있었다. 60대 후반이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우리 병원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의식이 없었다. 한방병원 암 병동을 찾는 암 환자는 이 환자처럼 더이상 손쓰기 어려운 마지막 단계에 보통 이곳에 온다. 보호자들은 미리 작성해둔 연명치료중단동의서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어머니가 고통 없이 가실 수 있도록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는 세 아들을 앞에 앉혀 두고 의학적 예후를 설명하자 모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을 넘기기 힘드실 것"이라는 말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가족은 남은 과정을 존엄하게 준비하며 어머니를 잘 보살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긴 대화 끝에 자리를 마무리하려 하자 큰아들로 보이는 보호자가 주춤하며 내 가운을 붙잡고 말했다.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미리 알려주실 수 있나요?”

지금 외국에 있는 막내 여동생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는 물론 임종 날짜를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건 경험상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전에 어느 병원 응급실에 갔을 때도, 연명치료중단동의서를 작성하기 전 또 다른 병원의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그리고 우리 병원으로 옮기기 바로 전날에도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거나 "이번 주를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막내는 급하게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환자는 그 고비를 넘겼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오갔더니 직장 다니는 막내가 쓸 수 있는 연차가 이제 일주일 남짓만 남아 있다고 했다.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르고 입출국을 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일주일도 빠듯했기에 막내가 최대한 빨리 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막내는 아들만 셋이었던 집안에 늦둥이로 태어난 딸이었다.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서 해외에 쭉 사는 터라 유독 더 애틋한 동생이라고 덧붙였다.

한 사람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끝이지만 남은 이들에게는 그 부재를 견디고 일상에 적응해나가는 단련의 연속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냈으니까. 그렇기에 저 부탁을 들었을 때 받은 압박감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말로는 "월  단위, 최대한 주 단위 정도로는 말씀드릴 수 있지만 구체적 날짜를 지정할 수는 없다, 죄송하다"고 했지만 그 날부터 나는 매일 기도했다. 저 가족이 온전히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도록 제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환자는 오랜 기간 와식생활을 해와서인지 상태가 하루하루 달랐다. 어느 날은 범상치 않게 안 좋아졌다가 다른 날은 갑자기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암 환자의 생체징후를 보다 보면 ‘오늘’ 돌아가실 것 같다는 예감이 맞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이전 병원에서도 거듭 임종 날짜를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 거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에도 몇 번이고 환자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매일같이 서로 교대로 의식 없는 어머니를 찾아와, 듣고 계실지 모를 일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세 아들의 모습을 보니 그런 노력을 더욱이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실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소름이 확 돋는 기분이 들었다. 환자 주변의 공기와 냄새가 변한 것처럼 느껴졌고 무엇보다 안색이 다르게 보였다. 그 이상한 변화를 동료들에게 묻자 “오늘 그 병실 전등 하나가 나가서 그런 거 아니야?”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진 채 보호자에게 전화했고 큰아들은 전화를 받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어머니 지금 안 좋으세요?”

나중에 들어보니 그 날 먼저 가신 아버지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꿈을 꾼 막냇동생이 오빠들에게 전화했고,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내가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내 전화를 기점으로 나와 보호자들은 임종 준비를 시작했다. 막내딸도 바로 한국으로 출발했다. 사실 생체징후 상으로는 평소와 비슷한 정도였는데 왜인지 모르게 이번에는 저절로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환자의 옆을 계속 지켰다.

겨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밤, 환자의 혈압이 잡히지 않기 시작했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첫 징후였다. 따님 도착시각을 물었더니 13시간도 뒤라고 했다. 결국 나는 이 가족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느끼며 "그때까지 버티기는 힘들 것 같다"고 보호자들에게 고했다. 그들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수긍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심전도에서 아무것도 측정되지 않는 걸 확인하고 환자 몸에 부착되어 있던 기계들을 떼어 내며 사망선고를 하려고 했다. “2021년….”

                                 프랑스 작가 펠릭스-조제프 바리아스의 '쇼팽의 죽음'(1885)의 한 부분.

연도를 시작으로 운을 떼려던 그때, 갑자기 환자가 크게 들숨을 쉬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는 너무 놀라 펄쩍 뛰며 손에 쥐고 있던 기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급하게 다시 확인해보았지만 잠깐 심장이 멈췄던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심전도에 다시 작은 그래프가 찍히기 시작했고 호흡도 1분에 1번꼴로 큰 들숨을 쉬고 있었다. 몇 시간 뒤 "심전도 상에 그래프가 멈췄다"는 콜을 받고 다시 찾아갔을 때도 너무 미약한 반응에 기계가 측정을 못 하고 있었을 뿐 환자는 여전히 아주 가끔 숨을 쉬고 있었다. 이때부터 모든 기계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의료진이 교대로 상주하면서 호흡을 체크하며 임종을 판단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 환자는 병실로 뛰쳐 들어온 딸이 울면서 “엄마, 날 기다린 거야?”라고 말하며 끌어안았을 때, 당신의 두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호흡을 멈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의료진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을 삼켰다.

이 모든 상황은 의학적으로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혹자는 우연이라 할 것이고 혹자는 간절함이 준 선물이라 할지 모른다. 무엇이든 간에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생각지 못한 순간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기 위함이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간절함을 잃지 않는다면 누군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살아내길 희망한다.

김은혜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

김은혜연구원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이자 암 환자를 돌보는 20대 한의사. 수백 명의 암 환자 옆을 지키며 겪은 일을 엮어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주세요』를 냈다.

c_projec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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