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것들/인 연

조선 청백리 1호

하정초원 2022. 12. 29. 17:11

경기 청백리의 뿌리를 찾아서] 경기 청백리 이야기 ⑤-조선 최초의 청백리 천곡 안성

대그릇 하나 들고 벼슬길 … 나라의 기틀 다졌다

2017-02-02     이동화

"죽은 뒷일은 '廉' 만을 지킬 뿐"
청렴·충의·선정·덕치 신조삼아
녹봉으로 빈민 구휼 … 절개 꿋꿋


천곡 안성(安省)은 조선시대 최초의 청백리다. 고려 우왕 6년 문과에 급제해 보문각(寶文閣) 진학사(直學士)와 상주 판관 등을 거쳐 1414년 태종 14년 강원도 도관찰사로 부임해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터전을 마련한 광주시 중대동 텃골(덕곡)마을은 광주 안씨 집안의 600년 세거지다. 광주 안씨는 안성과 함께 안팽명, 안후열, 안구, 안처선 등 5명의 청백리를 배출한 명문가문이다. 후손이 실학자 순암 안정복이다. 대대로 벼슬을 했던 집안이지만 당색이 남인이기에 순암의 아버지 이후 벼슬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선영이 있는 광주 덕곡마을에 정착했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천곡(泉谷) 안성(安省, 1351∼1421)은 고려 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그는 태조 1393년에 조선시대 최초의 청백리로 녹선됐다. 태조·정종·태종 등을 섬기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그는 어릴 때 한쪽 눈이 작아서 '소목(少目)'이라 불렸다. 고려 우왕 초 진사시에 합격했을 때 우왕이 이름을 소(少)와 목(目)을 합친 '성(省)'으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든가,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고향 함안으로 낙향했다. 그런데 태조가 혁명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할 만한 신하를 찾던 중 고향에 내려간 안성을 불러들여 개성 유후(留後)라는 직책을 임명했다.


이에 안성이 "조상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이고, 나 또한 고려의 신하인데, 어찌 조선의 신하가 될 수 있단 말인가"라며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통곡했다. 주변의 공신과 대신들이 그를 죽이려고 들자 임금이 급히 말리며 "나에게는 역신이나 고려에는 충신이다.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 선비들 중 누가 군주에 충성하겠느냐"고 말렸다.


부득이 벼슬에 나간 이후 그는 선정과 덕치를 이루고 청렴을 생활화 했다. 이에 태조 때 조선왕조 처음으로 청백리 제1호로 녹선됐다. 특히 동문수학한 태종이 그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했는데, 대간들이 임명장에 서명하기를 기피했다. 신하의 반대에 화가 난 태종은 서명제도 자체를 없애고 직접 친필 왕지와 교지를 내려서 그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짐이 조정을 다스리고 경이 지방을 다스려 준다면, 이로 하여금 만백성이 평안함을 얻으리라'라고 썼다. 이 어필은 현재 전북 장수군 어필각에 문화재로 보존돼 있다.


그는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섬기면서, 본인에게는 청렴, 국가에는 충의, 백성에게는 선정과 덕치를 신조로 삼았다. 명망가에서 태어나 학덕과 절의를 겸비한 위대한 학자요 정치가며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빙벽저절(氷檗著節)의 삶이었다. 특히 상주 판관 재직 중 선정을 베풀고 성을 개축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니 백성들이 믿고 따랐으며, 독곡 성석린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오직 안씨가 으뜸'이라고 했다.


그는 고려와 조선에서 40년 동안 6개 지역에서 감사를 지냈다. 그가 벼슬길에 오를 때 가져간 것은 오직 책과 이불을 담은 농(籠, 대그릇) 하나 뿐이었다. 벼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올 때에는 대그릇이 낡아서 물건을 담을 수가 없었다. 부인 송씨가 말하기를 "대그릇이 찢어졌는데 왜 다시 바르지 않소"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헌 종이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바른단 말이요"라고 했다. 그는 녹봉으로 빈민을 구휼하고 집에는 한 섬 곡식이 없어도 그러니하고 꿋꿋이 절개를 지키며 가는 곳마다 교화를 이룬 청백리였다.


방촌 황희가 안성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몸소 가서 서로 손을 잡고 이별을 고하며 '치자(治者)의 도(道)'를 묻자, 안성이 "우리가 죽은 뒷일은 다만 청렴 '렴(廉)'자 한 자 만을 지킬 뿐"이라고 했다. 이어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으니 마땅히 보답해야 할 것인데'라고 했다. 여기서 그의 청렴함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또다른 광주 안씨의 청백리 안구(1458~1522)는 청도군수를, 안처선(安處善)은 진주목사와 경상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안팽명(安彭命)은 대사간으로 명성을 날렸다. 또 안후열(安後說, 1632~1664)은 사간원 등 삼사에서 봉직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만 전념하는 영광을 누렸으며, 선조수정실록 편찬에도 힘썼다.
/글·사진 이동화 기자 itimes2@incheonilbo.com

# 무학대사가 잡아준 '영장산 기슭 묏자리'
"광주부 경안면 갈마치(고개이름) 영장산 남쪽 산기슭은 사간공의 장지이다. 조선조 초에 이름난 승려인 자초선사, 호는 무학이 점찍은 묏자리다." 사간공 안성의 13대손이 쓴 '덕곡 선묘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무학대사가 안성의 묏자리를 잡아준데는 사연이 있다. 안성의 후손으로 광주 텃골마을에 살고 있는 순암의 8대 손 안용환(72)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태종이 안성에게 '왜, 공은 죽은 후에 사용할 묏자리는 봐두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안성이 "이미 봐두었습니다"라고 말하자, 태종은 무학대사에게 '그곳에 가서 어떤 자리인지를 알아보라'고 명했다. 무학대사가 현장을 확인하고 나서 "그 묏자리는 나라에서 쓸 묏자리이지, 사가에서 쓸 자리는 아닌듯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태종이 안성에게 "그럼, 그 자리를 날 다오"라고 했다. 이어 무학에게 "내가 받았으니, 대신 안성의 다른 묏자리를 봐줘라"고 명했다.


무학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한 곳을 찾아서 보고했다. "새로 찾은 자리는 판서 이상 인물은 안 나오고, 천석군도 나오지 않는 자리이고, 나라가 망하면 가문이 망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자리는 좋습니다." 태종이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면 가문은 당연히 망하는 법이니, 그곳으로 정하도록 하라'고 했다.임금이 신하가 묻힐려고 봐두었던 묏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그곳이 지금 태종이 묻혀있는 서울 서초 내곡동 헌인능이다. 무학대사가 대신 안성의 묏자리로 잡아 준 곳이 현재 사간공 안성이 묻혀있는 경기도 광주시 텃골마을 영장산 기슭이라는 이야기다.
/이동화 기자 itimes2@incheonilbo.com

# 광주 안씨 600년 세거지 '텃골마을'
안성 등 청백리 5명 배출 명문가순암 안정복 '서재 이택재' 건립, 천곡 안성이 묻힌 텃골마을(德谷)은 광주 안씨의 600년 세거지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텃골 안씨들은 조선 전기 개혁적인 사림파로 활동했다. 하지만, 후손들이 갑자사화와 기묘사화로 정치적 시련을 겪기도 했다. 조선중기 문신으로 선조의 매부인 광양군 안황(安滉)이 재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임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호종했다가, 환도하는 도중에 병으로 순직, 호종공신 2등에 녹훈되면서 불천위 제사를 허락받았다. 이어 인조대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제 안응형(安應亨, 1578~1655), 조선 후기의 실학자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등을 배출했다.


특히 안정복은 성호 이익을 계승한 실학의 대가다. 그는 텃골에 서재로 사용한 '이택재(麗澤齋)'를 건립했다. 관직에서 은퇴하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친 곳이다. '이택'은 〈주역〉에서 유래한 말로, '인접한 두 연못의 물이 물기(水分)를 유지하게 한다는 뜻으로, 벗들이 서로 도와 학문과 덕행을 닦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그는 <동사강목>에서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웠다. 그는 '민심을 읽고 백성을 잘 살게 하고 실정에 맞는 토지제도와 지방자치안을 실천하는 것'이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이런 그의 실학적 목민사상을 〈임관정요〉로 정리했다. 이 책은 나중에 〈목민심서〉의 바탕이 됐다. 순암의 후손 안용환(72)씨는 "실학의 3대 거두,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순암의 <임관정요>가 아니었으면, 다산의 <목민심서>가 나올 수 있었을 지 없었을 지 모를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이동화 기자 itimes2@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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