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어느 군인 아내가 보내온 편지
- 며칠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저는 대한민국 육군의 아내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글이었다. 편지를 보낸 부인은 육사(陸士)를 졸업한 남편을 만난 뒤 17년간 열 번 이사를 다니며 머릿속에서 지운 단어가 있다고 했다. '부귀영화(富貴榮華)'였다.
"제가 이사를 특별히 많이 다닌 건 아닙니다. 남편 동기들은 보통 스무 번 넘게 옮겨다녔거든요. 제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그런지 이사도, 전방 오지(奧地) 근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군인으로서의 삶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가족이 작년부터 혼란에 빠졌다. 천안함 폭침 직후였다. "신문에 숨진 장병(將兵)의 부모에게 멱살 잡힌 대령 사진이 실린 걸 보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우린 국민을 지키려고 존재하는데 믿어주지도 않는 국민을 왜 지켜야 하는지….'" 아는 재미교포 2세 군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아내는 남편이 불쌍해졌다고 한다. "미군 중령은 월급 외에 집세를 450만원 받습니다. 미국이 부자(富者)나라여서만은 아닙니다. 군인이 존경받기 때문이지요. 전 그게 자랑스럽습니다."
국민에게 멱살 잡히는 국군, 국민에게 의심받는 국군, 국민이 곁에 있는 걸 싫어하는 국군의 아내는 서울 서초동 정보사(情報司) 부지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었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했다.
"편지를 쓰게 된 건 월급 푸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보사 부지 군인아파트 기사 때문입니다. 군인아파트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럼 지금 서초역 주변에 있는 정보사 아파트도 눈엣가시겠네요. 금싸라기 땅을 허접한 군인아파트 때문에 썩히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모욕적인 말입니까."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환경 때문이라는 주민 인터뷰도 봤습니다. 그런데 서리풀공원 주변에 아파트가 없나요? 군인을 유해(有害)시설로 보기 때문 아닌가요? 똥별, 식모(食母)별…, 이런 군인이 대다수인 양 이야기할 때마다 느끼는 치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린 가난해야 참군인이고 낡은 차 타야 올바로 살아온 것처럼 되나요."
군인의 아내가 기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2009년 11월 7일자 신문에 쓴 짤막한 후기(後記) 때문이었다. 당시 지방 취재 중 목격한 광경이었다. '군부대를 지나는데 그들이 사는 아파트를 봤습니다. 하나같이 낡고 우중충한 모습에 비좁아 보였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도 딱한 그런 곳에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대접을 하면서 유사시 국민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이 대목에서 군인의 아내는 울었다고 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복무 10년 이상 된 직업군인의 자가(自家) 보유율은 31.5%다. 나머지는 자기 돈으로 세를 얻거나 관사(官舍)·군인아파트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사가 더욱 잦을 수밖에 없다. 관사나 군인아파트는 보통 15~18평 정도다. 누군가 그 열악함을 인터넷에 올렸다. "아는 군인 장모(丈母)가 관사를 둘러본 뒤 딸을 보며 울었답니다." 기자에게 편지 보낸 군인 아내의 어머니도 아마 딸의 처지에 소리없이 울었을 것이다.
특전사(特戰司)·3공수여단, 국군기무사, 정보사령부가 하나같이 부대 이전 때마다 주민 반발에 곤욕을 치렀다. 정보사 그 비싼 땅에 뭘 짓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면서도 군(軍)이 주변에 있는 건 싫어하는 국민이 참으로 무섭다. - ( 출처 : 조선일보 2011년 4월8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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