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것들/인 연

지정환 신부님

하정초원 2012. 7. 22. 09:46

[Why] [김윤덕의 사람人] '임실치즈'의 代父… 디디에 세스테벤스, 지정환 신부

 

  • 김윤덕 기자 

입력 : 2012.07.21 03:27

 

신부님, 김치 나라에 '치즈의 기적'을 행하다
유신시위로 체포… 朴 前대통령, 치즈만든 공로 듣고 추방명령 취소

 

휠체어 신세인데도 노(老)신부는 아이처럼 신이 났다. 텁수룩한 수염 사이로 전라도 사투리가 흘러나왔다. "젊어서 배우처럼 자알~ 생겼었제. 사제 안 되었으면 연애박사가 되었을 것인디." 신부의 손끝이 가리키는 컴퓨터 화면이 흑백사진들로 가득하다. '1931년 12월 5일'이란 글자가 적힌 출생신고서, 일곱살 적 작은형과 찍은 사진, 한 달 반 배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올 때 찍은 여권사진, 임실에서 처음 비누갑에 치즈를 만들던 시절의 사진들…. 페르귄트 조곡이 나지막이 흐르는 서재에서 신부는 흡족한 표정으로 지나온 흔적들을 회상했다.

디디에 세스테벤스(81).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지만 '지정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반세기였다. 전쟁 직후의 한국을 선교지로 택한 건 순전히 젊은 혈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언제 원자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한국에 가고 싶었다. 1959년 전주교구 신부로 부임한 뒤 '사고'도 많이 쳤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마련한다고 부안 바닷물을 막아 여의도보다 두 배나 넓은 간척지를 만들었고, 임실로 부임해서는 산양을 키워 치즈를 만들었다. 명실공히 '임실치즈'의 원조다. 지학순 주교를 구속한 유신정권에 맞서 시위를 하다 추방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정의가 환히 빛나게 하려고 지랄한다'가 내 이름 뜻이여." 1980년대부터는 장애인 공동체 '무지개 가족'의 지도신부로 중증장애인을 위한 재활사업에 헌신, 2002년 호암상을 수상했다. 상금 1억원을 종자돈으로 설립한 무지개장학재단은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장애인들에게 등불 같은 존재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지난 10일, 지정환 신부가 살고 있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을 찾았다. 치즈 만들면서 얻은 다발성신경경화증으로 지팡이 없이는 몇 발짝 걷지 못하는지 신부는 주로 휠체어에 앉아 모든 일을 처리했다. "이눔이 폭탄이라. 다리로 왔다가 눈으로 왔다가 지 맘대로여. (경화증이) 눈에 왔을 때 제일 힘들제. 책도 못 읽고 운전도 못 하고 컴퓨터도 못하니. 그래도 괜찮어. 애인(병)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도 재미있어." 지 신부는 요즘 한국 천주교 교회사를 정리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남긴 1800년대 자필 문서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그의 집에는 '별아래'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벨기에 귀족가문 막내
1959년 젊은 혈기에 온 한국, 온통 풀밭에 헐벗은 농민들
치즈 개발 도전… 가난 대물림하던 청년들 꿈에 날개 달아

사랑은 주고 받는 것
한국을 '위해' 일한 게 아니라 그저 '함께'했을 뿐
내 장례미사엔 노사연의 '만남'을…

별 아래, 달 아래


―왜 '별아래'입니까.

"고문서를 정리하다 찾아낸 이름이에요. 지금은 북한에 속한 강원도 이천의 마을 중에 '별아래'가 있었어요. 별 아래 있는 마을이라니 얼마나 예쁩니까. 그래서 우리 집은 '별아래', 옆집은 '달아래'예요. 일제강점기 들어와 마을 이름들이 죄다 한자어가 되는 바람에 아름다운 한국말들이 사라졌어요. 우리 동네 이름인 '다리목'도 배(梨)가 많은(多) 동네라는 뜻의 한자어죠."

―우리말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한국말 어려워 울면서 배웠는데 알면 알수록 정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한자도 좋아해요. 한글과 한자의 맛이 완연히 다르지요."

―일선에서는 물러나신 건가요?

"2003년 무지개가족 지도신부직을 사임했고, 지금은 무지개장학재단이 잘 굴러갈 수 있게 돕고 있어요. 가끔 미사 집전은 합니다. 본당 신부들이 바쁠 때나 우리 동네 천주교 노인복지시설, 무지개가족 장애인 미사 등등. 내가 집전하는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이뤄져요. 장애인이든 아니든, 지병이 있든 없든 미사 도중에 절대 일어나지 말라고 해요. 일어설 수 없는 장애인들이 창피함을 느끼니까요."

―'무지개가족'은 중증장애인 재활센터로 명성이 높습니다. 약물치료보다 운동을 통한 재활에 중점을 둔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 끊어진 신경에는 약이 없어요. 줄기체세포? 모두의 희망일 뿐이지요. 100년 후에나 가능할까요? 약을 믿으면 안 돼요. 침, 쑥뜸 다 소용없어요. 나도 19일 동안 다리에 쑥뜸 고문을 받았는데 아무 소용 없더라고요. 방법은 운동, 운동, 또 운동뿐이에요. 침대에 누워 있으려고만 하면 안 돼요. 휠체어에 앉았다가, 다음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려고 노력해야지요."

지 신부를 도와 무지개장학재단에서 일하는 오선(52)씨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체대 출신의 전직 체조 코치였던 그녀는 선수들에게 시범을 보이다 평행봉에서 떨어지면서 전신마비가 됐다. 절망감에 자살 기도까지 했던 오씨는 무지개가족에 오게 되면서 제2의 인생을 얻는다. 침대에서 꼼짝 못했던 그녀는 운동과 재활치료로 이제 휠체어에 앉아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룬다. 지 신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사이버대학에서 장애인복지를 전공하기도 했다.

―장애인 주거지, 휠체어 하나도 신부님이 직접 설계하고 개조한다고 들었습니다.

"문턱 없애고, 침대에 누워서도 바깥 풍경을 볼 수 있게 창문을 낮춰 달고요. 그리고 휠체어는 오래 앉아 있으면 욕창이 생기고 심장이 약해집니다. 팔에 힘이 없는 장애인들도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할 수 있게 팔걸이 밑에 스프링을 설치했지요.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팔걸이가 밑으로 내려가게끔. 그렇게 하루종일 팔운동을 하다 보면 팔에 힘이 생겨요. 또 하루에 몇 번씩 환자의 겨드랑이, 허벅지, 엉덩이 부위를 버팀목에 고정시켜 직립상태로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면 심장이 계속 펌프질하게 되고 튼튼해지지요. 사지마비로 들어왔다가 지금은 혼자 일어나 식사까지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중증장애인에게 운동은 또 다른 고통 아닐까요.

"그래서 컴퓨터부터 가르쳤어요. 교구의 세례문서를 다 받아와 장애인들에게 나눠주고 타이핑 훈련을 시키고, 부기도 가르치고, 그래픽도 배우게 하고요. 오선씨만 해도 열 손가락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엄지로 1분에 100타 정도 칩니다."

―장애인 스스로 일어서는 자활법은 어떻게 생각해내신 겁니까.

"신학생 시절 방학이면 의대생, 간호사 몇몇과 함께 그룹을 이뤄 장애인 봉사를 나갔어요. 그때 장애인 그룹을 이끌던 여성이 우리들에게 내린 첫 당부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걸 절대 대신해주지 말라는 거였지요. 이를테면 허락 없이 휠체어를 만지지 않는 겁니다. 휠체어는 장애인의 옷과 같다고 하더군요. 우리의 역할은 장애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대신해주는 게 아니란 걸 그때 배웠어요."

―욕창 치료의 달인이라고 하던데요.

"벨기에 신학교는 입학해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의 길을 계속 갈 것인지 결정합니다. 철학을 마치면 다음 1년간 병원에 가지요. 모든 진료과를 돌면서 수술하는 것도 보고 아기 낳는 것도 보고요. 주사 놓는 건 기본이죠. 신학생들은 군대에 안 가는 대신 간호사 교육을 받는 셈인데, 그때의 경험이 장애인들 욕창 치료할 때 아주 요긴했어요. 그야말로 '주야빵꾸' 아닙니까(웃음). 밤낮으로 욕창에 시달리니.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주야빵꾸를 내가 고친답니다."

―중증장애인 재활에 헌신한 공으로 2002년 호암상을 수상하셨지요?

"어느 날 서울에서 교수들이 내려와 우리 센터를 보고 가더군요. 며칠 뒤 전화가 와요. 호암재단인데 상을 받으러 서울로 오래요. 상 주고 싶은 사람이 와야지 내가 왜 서울로 올라가야 하나 싶어서 그냥 우편으로 보내시면 안 되느냐 했지요. 상금이 1억원이나 되는 줄도 모르고.(웃음)"

 
1960년대 부안성당 주임신부(가운데)로 일할 때 신도들과 찍은 사진. “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가겠느냐?”고 묻자 지정환 신부가 답했다. “50년 전 한국으로 떠나야 하는 사제라면 안 할거여. 두 번 다시는 못 할 짓이여. 하하!”
 
쓸개 빠진 신부

지정환 신부는 기사 작위를 받은 벨기에 귀족가문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 신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치즈로 만든 무지개'에는 열한살 무렵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천주교 신자가 80%인 벨기에는 전 세계에 나가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아주 많았어요. 휴가철이면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에 대한 강론을 했는데, 그때 동경을 품게 됐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무조건 남을 돕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부모님이 신부 되는 건 찬성했지만 선교지를 한국으로 택한 건 극구 반대하셨다면서요.

"전쟁 직후의 한국은 아프리카보다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였거든요. 중국의 참전으로 제3차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부모님은 콩고로 가라고 하셨는데 거기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가 있으니 한국으로 가겠다고 우겼지요."

―두렵지 않았습니까.

"6·25전쟁에 참전한 벨기에 군인들의 사망소식, 한국·중국 등지로 선교하러 들어갔다가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당한 신부들 얘기를 들으면서 잠시. 결혼을 앞둔 여자가 흔들리듯이요(웃음)."

―초반엔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당시 한국에 포장된 길이라고는 서울에서 인천 가는 길뿐이었죠. 여름에 비라도 오면 버스 운전기사가 '다들 내려서 버스를 밀어주십시오' 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나무와 (클래식) 음악이 없다는 것이었죠."

―한국말은 금세 익숙해졌습니까.

"부안성당 시절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어요. 외모가 특이하니 승객들이 죄다 쳐다보는데 노인 한 분이 물어요. '몇살이나 먹었는가?' '서른살입니다' 했더니, '장개는 갔어?' 하십니다. 전북 장수군 '장계'라는 마을에 두어 번 다녀온 기억이 있어 자신 있게 '네, 두 번 갔습니다' 했더니 어르신이 버럭 화를 내더군요. '이런 호로 상놈이 있나.'"

―부안에서 농민들과 간척지를 개간하셨지요.

"1961년의 부안에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넘쳐났어요. 농사는커녕 막대기 하나 꽂을 땅조차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죠.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면 가난을 면할 것 같아 농민들과 3년에 걸쳐 100정보의 땅을 개간했습니다. 벨기에에서 원조물자로 들어오는 밀가루 2000포대 중 일부를 팔아 인건비로 충당하면서 개간한 결과 100명의 농민에게 1정보(3000평)씩 나눠주게 되었으니 가슴이 벅찼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였어요. 간척지의 특성상 가뭄이 들면 염분 때문에 벼가 모두 죽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걸 인내로 이겨내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없었거든요. 당장의 배고픔을 참을 수 없으니 땅을 저당잡혀 쌀과 술을 샀고 노름에 빠져들었죠. 결국 피땀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고리대금업자들에게 헐값으로 내어줬고요."

―그 기간에 신부님도 병을 얻으셨지요.

"일이 고되기도 했지만, 한국음식에 익숙해지기 전이라 빵과 라면으로 아침저녁을 때우다 담낭(쓸개)에 문제가 생겨 제거수술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쓸개 빠진 놈이 되었지요(웃음)."

지체장애 1급인 오선씨의 휠체어를 자동차 안으로 밀어올려 주는 지정환 신부. 오씨는 “오경추를 다친 내가 이렇게 기적처럼 살아가는 것은 모두 신부님 덕분”이라며 웃었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1961년 부안
농사로 가난 떨치게 하려 바닷물 막아 간척지 개간
100명에 3000평씩 줬지만 노름에 빠져 다 뺏기더라

1967년 임실
굶주린 청년들과 치즈개발 3년간 온갖실패 맛보고 결국 프랑스 가서 비법전수
우리 치즈 맛본 조선호텔 첫 70kg주문 땐 눈물 왈칵

2012년 완주
중증장애인 재활센터 차려 운동시키고 컴퓨터 교육
사지마비로 들어왔다가 일어나 숟가락 들고 나가

행복이란…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음식
난 대한민국의 神父 여기가 벨기에보다 좋다


지정환임실치즈피자

수술을 위해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6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온 지정환은 부안에서 임실성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간척지 개간이 실패한 뒤 '한국인들의 삶에 다시는 깊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하지만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대물림하고 있는 임실 주민들을 보니 또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만 개입하자는 심정으로' 임실 청년들과 함께 신용조합운동을 전개했다. 치즈 만들기도 이 무렵 시작했다.

―어쩌다 치즈를 생각해낸 겁니까.

"아는 신부님한테 선물로 받은 산양을 두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임실의 너른 풀밭에 소의 10분의 1 값도 안 되는 산양을 키워 그 젖을 짜서 판매하면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물론 뜻대로 되진 않더군요. 수요가 적어 기껏 짜낸 산양유가 남아서 버려졌으니. 팔고 남은 산양유를 처리할 방법을 고심하다 치즈를 떠올린 거예요. 연유나 분유 같은 가공식품은 엄청난 시설비용이 들지만 치즈는 달랐죠. 유럽에서는 혼자 집에서 치즈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 치즈를 플라스틱 비누갑에 응고시켰다면서요.

"약탕기, 멸치국물 낼 때 쓰는 망까지 동원해 아마추어처럼 만들었죠. 모양은 치즈인데 품질이 고르지 않으니 상품 가치가 없어 치즈공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벨기에 부모님께 2000달러를 받아 작은 치즈공장과 발효공간은 확보했는데 이번엔 또 유산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누가 막걸리 만들 때 쓰는 누룩을 넣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시도했다가 다시 실패하고. 시행착오만 무려 3년이었으니 포기하는 농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급기야 치즈 기술을 배우러 프랑스로 떠납니다. 대개는 포기할 만한데 꽤 집요했습니다.

"기왕 미쳤으니 끝까지 미쳐야죠(웃음). 3개월 동안 프랑스·벨기에 치즈공장을 견학하면서 성분배합비율, 공정 과정을 꼼꼼히 살폈지요. 카망베르치즈·체다치즈 등 종류별로 산도를 조절하는 법도 배우고요. 이탈리아의 치즈 기술자가 건네준 노트가 결정적이었죠. 각종 치즈의 제조법들이 적혀 있었으니까. 그 노트를 품에 안고 임실로 돌아올 때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1969년 지 신부는 임실치즈 생산에 성공한다. 벨기에 천주교 구제회를 통해 치즈가공기까지 무상으로 제공받으면서 치즈 생산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판매망도 확보했다. 1970년대만 해도 치즈는 미군부대를 통해 불법으로 유통되는 것이 전부였다. 지 신부는 100%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합법적인 치즈라는 점을 강조하며 남대문 등지의 외국인 전용상점에 이어 특급호텔로 판매망을 넓혔다. "조선호텔이 우리 치즈 맛을 보고 그 자리에서 70㎏을 주문했을 때는 감동의 눈물이 터져나왔지요." 산양유를 우유로 바꾸고 체다치즈 생산에도 성공하면서 임실치즈는 점점 유명세를 탔다. 한국에서 생산된 최초의 치즈였고, 농민들의 땀방울로 일궈낸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업가 기질이 다분하십니다.

"우리 고조할아버지가 1831년 보험회사를 시작했어요. 벨기에의 가장 큰 보험회사로 성장했고 나중에 벨기에의 큰 은행들까지 인수했죠. 비록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무너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경영에 대한 기본 소양은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애써 다져놓은 임실치즈가 최근 들어 진통을 겪고 있다 들었습니다. 신부님 이름을 딴 '지정환임실치즈피자'는 특허권,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많았지요?

"임실치즈로 피자를 만들어 팔면 치즈 소비에도 도움이 되니 나한테 얼굴을 빌려달라고 해요. 처음엔 반대했지만, 치즈시장 개방으로 값싼 외국산 치즈가 밀려오는 마당에 우리 임실치즈를 되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빌려줘야 한다고 마음을 바꿨어요. 그래 봤자 전북 지역에 10여 곳 정도 생길 줄 알았는데 2년 새 전국에 지정환피자 체인이 100개가 넘게 생긴 거예요. 이익을 둘러싸고 싸움이 뻥뻥 터지고, 그때마다 이해당사자들이 나를 찾아와 괴롭히니 화가 나요. 그래서 변호사를 불러놓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수익의 5%를 무지개장학재단에 내놓아야만 내 얼굴과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덕분에 장학재단 종자돈이 크게 늘어났습니다만."

 
지정환 신부(오른쪽)가 일곱 살 때 작은 형과 함께 찍은 사진. 한국에서 사느라 부모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모두가 그들의 功

―유신정권 시절 지학순 주교 석방운동을 하다 추방당할 뻔하셨지요.

"신부들 모인 자리에 가면 '3악공'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서 경찰들한테 진작에 찍혔지요. 공산당, 공해, 그리고 공화당이 3악공이에요. 신문에다가는 'YOU SIN REPENT NO MORE YOU SIN'이라는 개인광고를 내서 여수 출입국 관리소에 불려가기도 했어요. 유신헌법 반대 광고인 걸 눈치 챈 경찰이 다그치길래 '지금이 사순절이라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자고 다짐하는 내용'이라고 둘러댔습니다(웃음)."

―교구에선 아주 골칫거리였겠습니다.

"제가 미움을 좀 받았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대통령 덕에 추방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시위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사진이 외신으로 나가고 벨기에 정부는 물론 부모님도 그 장면을 보게 됩니다. 벨기에 정부에서 한국 외무부로, 다시 청와대로 보고되자 박 대통령이 '지정환이 어떤 놈이여?' 하고 물었겠지요. 호출된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임실서 농민들과 치즈공장 세운 사람입니다' 하니까 당장에 추방명령 취소하라고 지시했대요. 박통이 농촌 발전이라면 껌벅 넘어갔으니(웃음). 치즈공장이 날 살렸지요."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가 요즘 노자(老子)에 빠져 있어요. 그중에서도 공수신퇴(功遂身退)라는 말을 좋아해요.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라.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권 이양을 제대로 했더라면 세계 역사에 남을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서운 지도자가 아니라 참 좋은 지도자가 되었을 거예요."

―대한민국이 신부님 모국도 아닌데 정치 시위까지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요?

"경찰도 내게 똑같이 묻더군요. '당신 외국 사람이지?' 하길래 '아니오' 했지요. 벨기에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대한민국 천주교 신부로서 살고 있다고 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요즘의 한국 정치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매일 저녁 뉴스는 봐요. TV를 보고 있으면 '아직도 한국에 사람들이 살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지요. 교통사고로 매일매일 죽고, 부정부패로 매일매일 잡혀들어가니(웃음). 민주주의는 참 어렵지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여전히 모릅니다. 선망의 대상이던 유럽 민주주의는 국민이 달라는 대로 주었다가 수입지출이 안 맞아 요즘 '주야빵꾸' 아닙니까. 외신을 보니 토론하다가 상대방 뺨도 때리고 권총까지 꺼내듭디다. 서로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내 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한, 지구촌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고 봅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고요."

―개신교를 두고 하는 말씀인가요?

"제일 배타적인 사람은 우리 교황이지요(웃음). 다음이 무슬림."

―사랑했던 여인은 없었습니까.

"저 아랫집 담벼락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어요. '나는 하느님 보고 꽃 하나 달라고 했는데 하느님은 공원을 하나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나무 한 그루 달라고 했는데 숲 하나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강 하나 달라고 했는데 태평양을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천사 하나 보내달라고 했는데 당신을 보내주셨다' 이것이 나의 답입니다."

―사랑은 열정입니까, 희생입니까.

"사랑은 주고받는 거예요. 사랑이 희생이면 위험하지요. 주기만 하다 보면 화가 나거든요. 누구를 '위하여' 일하지 마세요. 남편을 '위하여'가 아니라 남편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부안에서 내가 실패했던 이유는 농민들을 '위해서' 일하려 했기 때문이에요."

―행복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지요. 한국이 벨기에보다 좋은 이유는 내가 지금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겸한 점심식사에 지정환 신부는 막걸리를 곁들였다. "운전은 술기운으로 해야지, 아니면 무서워서 못혀." 영락없는 시골 아저씨 넉살이다. 곁에 있던 오선씨가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 "신부님이 당신 장례미사에 노사연의 '만남'을 꼭 불러달라고 교구 신부님께 부탁하셨어요." 그 이유를 지 신부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도 배움도 민주주의도 모두 만남에서 시작되니까요. 다시 노자 이야기를 할까요? '공수신퇴'는 지도자들에게 하는 말이지요. 백성한테 가거라. 가만히 앉아서 '이놈 이리 와'가 아니라 백성 속에 들어가 함께 살아라. 그들에게 배워라. 거기서 공을 이루었으면 모든 공을 그들에게 돌려라. 치즈도, 무지개가족도 내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그들'의 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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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 2012년 7월 21일자 조선일보> 

 

1983년 전라북도 익산시로 직장 발령을받아 신혼시에 처음 지신부님을 뵈었었다, 물론 집사람은 그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그래서 지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었다, 물론 고인이 되신 원주의 지주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익산시 영등동의 "나환자 치료병원인, 성모병원"에서 기거하시면서 장애자들을 보살피고 계셨는데,,,, 유머와 넉넉하심에 늘 존경하고 살아왔는데 오늘 이 기사를 접하니 그동안 뵙지못한 큰죄를 지은것같습니다,

 

그당시 돕는다고 닭집같은 천막집을 찾아갔던일,, 10여년이 지난 전주성당에서 신부님의 근황을 듣던일...., 한없는 낮음을 실천하신 신부님을 뵈오니 너무나 고맙습니다, 평생을 사랑하신 한국사람들, 그리고 임실치즈를 대신하여 멀리서나마 기도드립니다, "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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