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황녀로서 고귀한 삶을 살지 못했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흔적도 없이 잊혀져버린 그 삶이 너무 아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덕혜옹주/다산북스>를 소설로 엮어낸 작가 권비영(60)씨의 말이다. 소설은 고종황제의 고명딸이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일본 땅에서 겪었던 고뇌와 참담함. 그리고, 나라 잃은 민족의 처절한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그 소설을 감명깊게 읽었던 필자는 쓰시마(對馬島)에 간 김에 덕혜옹주(1912-1989)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앞에서-
가네이시 성터 입구 |
쓰시마(對馬島) 시(市) 청사를 지나서 좌측으로 돌자 가네이시(金石: 宗가문의 성) 성터가 있었다. 입구의 성문은 우리의 기와집 형태와 비슷했다. 안내 푯말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는 비(碑)가 하나 서 있었다. 필자는 그 비문(碑文)의 전문을 읽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비(碑) |
<조선국 제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1985)' 공(公)과 결혼, 동년 11월 쓰시마(對馬島)를 방문했다. 쓰시마(對馬島)주 소가(宗家) 당주가 조선의 왕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래도(來島)하였으므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 비(碑)는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여, 쓰시마 거주 한국인들이 건립했다. 한편, 시미즈(淸水) 산성에는 쓰시마 도민들이 경축하며 섬겼던 기념비와 철쭉이 지금도 남아 있다. 결혼 생활은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하고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갈등이 심하여 두 분은 1955년에 이혼했으며, 다케유키(武志) 공은 1985년에, 덕혜옹주는 1989년에 별세했다. 역사에 묻혀 있던 이 기념비를 재건하여 두 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며,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
문장 구성은 다소 어색했으나 의미는 정확하게 전달됐다. 필자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상념에 잠겼다. "결혼 생활은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하고 애정이 깊었다"는 대목에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소설 속 이야기
"고귀한 그대가 일개 쓰시마 번주의 아들에게 시집온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오. 하지만 어찌하겠소.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을..."
"...."
1931년 쓰시마 방문 당시 부부의 모습(사진: 야후재팬) |
"나 역시 황실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오....그대에겐 부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피해자요."
"피해자라고요? 피해자?"
"그렇소.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지배국의 백성이고 그대는 속국의 황녀라는 차이뿐이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덕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차마 내뱉지 못할 말들이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차올랐으나 꾹 참았다. 얼마나 서럽고 원통했을까. 비문에 새겨져 있는 그 다음의 문구에도 의미가 있었다.
"양국의 갈등이 심해서 이혼했으며...두 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며,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양국의 관계는 어떠한가. 화해와 평화는 멀리 달아난 듯하고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있지 않은가.
순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한 역사는 잠깐 그럴듯해 보일 뿐 진정한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는 일본의 유명작가 '하하키기 호세이(帚木蓬生·68)' 선생의 소설 <세 번 건넌 해협>의 한 구절이 떠 올랐다.
가네이시 성터 공원을 거닐다
필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성터 공원의 매표소에 이르렀다. 입장료가 300엔(3000원 정도)이었다. 필자가 입장권을 구입하자 담당 직원 하라타 하쓰미(原田初見·46)씨가 반가워하면서 말을 건넸다.
"어디서 오셨나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한국의 관광객들은 대충 덕혜옹주 비(碑)만 보시고 돌아가시는데...정원을 보시려는 이유가 있으시나요?“
"아닙니다. 그냥 한 바퀴 돌아보려고 합니다."
가네이시(金石) 성터의 공원 |
하라타(原田)씨와 주고받는 대화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잠시 후 그가 100엔(1000원)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소위 '할인을 해 준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웃으면서 안 받으려고 하자, 그가 굳이 필자의 주머니 속에 동전을 넣어주었다. 당일 첫 손님에게 주는 특혜(?)라고 했다. 특혜 치고는 미미했으나, 정성스런 마음이 엿보였다. 그는 필자를 따라다니면서 덕혜옹주와 정원에 대해서 설명했다.
"정원이 아름답지요? 저 산에는 봄이면 덕혜옹주의 래도(來島) 기념을 위해서 심었던 철쭉이 만발합니다."
한적한 정원은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성터를 돌아 본 후 입구로 나오자 하라타(原田)씨는 동백나무 울타리에서 고개를 내밀고서 손을 흔들었다.
동백 울타리에서 고개를 내밀면서 손을 흔드는 하라타 씨- |
나이에 비해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한일 관계도 이렇게 친밀함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필자도 그에게 손을 흔들면서 작별했다. 성터를 벗어나자 쓰시마의 구름들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네 인생처럼...
작가와의 통화
이 책을 쓴 권비영 작가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쓰시마 여행길에서 덕혜옹주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소설을 썼다"면서 그녀의 죄(?)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 <지나치게 영민한 것, 품어서는 안 될 그리움을 품은 것, 조선의 마지막 황제의 딸로 태어난 것...>
필자는 여기에 두 가지의 죄(罪)를 더하고 싶다.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유린한 침략자들의 죄, 자신의 나라를 지키지 못한 위정자(爲政者)들의 죄다.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37년. 15년간의 정신 병원 생활...하나 뿐인 딸의 자살, 그리고 조국의 외면....
덕혜옹주-그녀는 결국 버려진 황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