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천주교 못자리와 초기 역사를 찾아서
<초기 한국 천주교회와 내포 지역>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충청도 내포 천주교회가 지니는 의미는 아주 크다. 서울을 비롯하여 양근, 전주, 내포, 충청 지역에 형성된 교회 창설기의 지역 교회 중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까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내포 지역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그 뿌리가 아주 깊었고, 천주교 신앙 전파의 폭도 아주 넓었다. 실제로 1815년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을해박해의 순교자들이나 1827년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정해박해의순교자들 대부분이 내포 지역 출신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현상이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내포 지역 교회가 일찍부터 터전을 잡게 된 배경에는 교회사가들이 '내포 혹은 충청도의 사도'라고 불러온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가 있었고, 그가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여사울이 있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1759-1801) 프란치스코교황 방문예정지로 알려져 있는 당진 솔뫼성지, 합덕성당, 신리성지, 여사울성지를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왔다. 늘 가까이 있었고 그래서 소흘했던 곳이며 미안한 곳이었다.내포란? 아산,당진,서산,태안,홍성,예산의 지역으로 고려,이조시대부터 수탈과 차별을 받았다, 그 영향인지 초기 천주교인의 순교자와 옹골찬 돋립투사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 내포다. < 솔 뫼 성 지 >충남 당진 우강면에 있는 '솔뫼성지'는 오는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문한다고 한다, 성지 경내에는 행사장소 계획 때문에분주한 모습이었고 순례자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솔뫼란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을 뜻한다.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된 솔뫼성지는 1만여 평의 소나무 군락지와 김대건 성인의 생가와 함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성지로 조성되어 있다. “신앙의 못자리” 라 불리는 솔뫼성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로 1845년 상해에서 서품을 받고 입국하여 신앙을 전파하다가, 1846년 병오박해 때 모진 고문을 받고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9.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 합 덕 성 당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 된 것을 보면 내포 쪽으로 집중 전파 된 특징이 있다. 바다를 통해 천주교가 유입되다 보니 바닷가인 서해 내포쪽이 천주교 유입의 주요 통로 역할을 하면서 이곳이 천주교 전파의 산실이 되었던거 같다.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145호이기도 한 합덕성당이야말로 이곳 내포 신앙의 한 축이었다 할수 있다.
이곳은 이미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세워진 양촌성당으로 출발했던 유서 깊은 성당이면서, 1791년의 신해박해부터 1868년 무진박해 때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성당은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명칭도 합덕성당으로 바뀌었고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신축된 것인데,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이고, 종탑도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당건물 뒤로 가면 이곳을 거쳐 갔거나 순교한 분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당시 이 건물을 설계한 페랭 신부는 6·25전쟁 때북한군에 납치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현재 성당 구내에 있는 그분의 묘소에는 유해가 없이 유물만 묻혀 있다고 한다.
< 신 리 성 지 >
합덕읍 신리는 넓은 들판에 위치해 있으며 박해가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다. 이곳에는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이자 성 다블뤼 안주교의 주교관(교구청)이 자리하고 있다. 안 주교은 1866년 병인년에 위앵 민 신부와 오매트르 오 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카와 함께 이곳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는데, 안 주교는 이 집에서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이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손자선은 관헌 앞에서 자신의 살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치명자로도 유명하다. 문헌에 기록된 신리-거더리 출신 순교자만도 40여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머리없이 발견된 무명 순교자의 묘와 손자선의 가족 순교자 묘 14기 등 40여 기의 순교자 묘가 있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서 충청도 내포 지방으로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이 공동체는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한 거더리, 세거리, 소덜, 강계, 양촌 등 주변 마을이었다. 성지는 지금도 신리란 이름과 함께 남아 있다. 신리 성지는 20여 평 되는 목조 건물로 1815년에 지은 초가집이었다. 이곳에서 배교자 이선이(李先伊)의 밀고에 의해 1866년 3월 11일 안 다블뤼 주교가 잡힘으로써 수 많은 무명, 유명의 순교자를 내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1863년 안 주교 부재시 이웃집에 난 불이 옮겨 붙어 귀중한 자료들이 다 타 버렸다. 지금도 그 때 불에 탄 서까래, 대들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교난 중에 이 마을의 부호였던 박경래의 소유가 되었다. 1927년 합덕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페랭(Perrin, Philipe, 백 비리버 문필) 신부가 이 집을 사들여 서울교구 부주교로 승품하신 원 아드리아노 라리보 주교님께 주교 승품 기념품으로 바쳤다. 그러나 건물만 교회 소유가 되고 대지는 여전히 박경래의 소유였는데, 순교기념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박경래가 대지 전부를 천주교 유지 재단에 기증하였고 후에 그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초가였던 이 집은 1954년 성모 성년 기념으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벽, 기둥, 서까래, 대들보, 주춧돌은 원래 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사용하였다. 1964년 다시 수리를 하면서 상량문을 다시 써서 올렸는데 대들보의 상량문에는 『天主降生 1815年 嘉慶 21年 丙子 2月 18日 辰時 上樑 (1954年 祝聖), 1964年 3月 23日 修理, 新里公所, 人間眞理 在於永生』이라고 씌여있다. 당시까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함석 지붕을 새로 이었다가 2003년 10월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2004년 4월 원형대로 초가집으로 준공식을 갖었다. 이곳은 다블뤼 주교가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전라도 강경 황산포에 첫걸음을 내딛은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기까지 21년간 지내셨던 장소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안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선교사가 됐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 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됐다.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낮이면 문을 잠그고 숨어서「한불사전」, 「한글문법」, 「불한사전」, 달레의 천주 교회사」의 기초가 된 자료수집, 문헌 번역, 순교자 행적을 기록하였다.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 토마스를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 등 많은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너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 일행(민 신부,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 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 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박해 시대의교우촌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 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 집에는안 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년 3월 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롤(Verolls, 方)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글(上書)이었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손자선 토마스도 다블뤼 주교와 함께 체포되어 1866년 순교하였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다블뤼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됐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다불뤼 교구장 집무실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아베마리아" 는 구노가 절친인 다불뤼 신부의 순교에 즈음하여 받치기위해 작곡한것으로 알려짐
< 여 사 울 성 지 >예산 여사울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일명 '단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여사울은 이존창의 고향이면서 그의 스승인 홍유한(1726-1785)이 1757년 서울에서 낙향한 이래 1775년까지살던 곳이다. 이존창은 양인 신분으로 죽을 때까지 그 신분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사회 질서에 순응하면서 그 자신의 위치에 만족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양인으로서는 여전히 어려웠던 학문적 욕구와 실천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신분을 극복하려 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이존창은 1784년의 한국에 천주교회가 도입된 직후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즉시 고향으로 내려와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785년 초에는 '여사울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내포 천주교회의 역사는 여사울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이존창의 활동으로 여러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 확대되었다. 이존창을 '내포의 사도'라고 일컫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이존창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1801년 4뤌 9일 참수되었다. 그의 딸 멜라니아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이며,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이곳에서도 교황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례를 마치면서...., 예전에 갔었던 아산의 공세리성당과 해미읍성은 순교자의 마음으로경건하게 다녀오리라 다짐해본다, 급작스럽게 다녀온 내포의 성지, 내 고향이면서도 무관심했던것을 부끄럽게여기면서 앞으로 남은삶, 순교자와 같은 길을 걸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하여 평화롭게 살고싶었다. 배려가고갈나고 평화스러움이 다할때에... 난, 아주 천천히, 느린 마음으로 이곳을 찾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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