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의 정의평화 운동사적 의미
발표자 : 이경국 안드레아
1. 서언(序言) <자료출처:"늘 맘처럼"카페에서>
원주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한 평신도로써 원주교구의 사회정의운동을 조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모른다.
더욱이 원주교구 설정의 의미는 무엇이며, 매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사목활동을 해야 했던 원주교구가 왜 사회정의운동을 전개해야만 했는가 그리고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전개 과정들은 어떠했는 가를 학문적으로 조명(照明)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한 평신도로써는 더욱 그러하다.
원주교구가 한국교회의 쇄신과 발전,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늘 자긍심(自矜心)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벌써 4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지학순 주교님의 선종, 장일순 요한 선생의 별세 그리고 그 대열에 앞장섰던 많은 원로 교우들의 타계로 이제는 먼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로 치부되는 현 시점에서 그 역사성이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그러나 특히 신입 교우들 그리고 젊은 교우들은 이 조그만 원주교구가 이 한국교회와 우리나라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하였는가를 잘 모르고 있어 늘 안타까웠던 차에 교구장이신 김지석 주교님과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원주교구의 역사를 재조명해 보고, 교구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였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원주교구 설정
1) 제 2차 바티칸공의회와 원주교구 설정
교황 바오로 2세는 1962년 10월부터 시작된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나 갈 무렵 한국 교회가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알고 춘천교구의 일부인 강원도 남부지방을 분리하여 1965년 3월 22일, 원주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에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45세)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해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 이 공의회에서 발표된 4개의 헌장(憲章)과 9개의 교령(敎令) 그리고 3개의 선언(宣言)은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진보학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작성된 문헌(文獻)들로서 한국 교회의 쇄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공의회 정신은 한국 교회가 당시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부정과 부패 등 사회적 부조리로 인해 투옥되고, 고통받고, 신음하는 지식인과 학생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의 편에 서서 사회 정의 구현에 앞장서게 하므로 써 한국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하였다.
2) 원주교구 설정 의의
원주교구는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주교구(主敎區)로 설정되어 그 의의(意義)가 자못 크다. 이는 전 세계 교회 속에서 한국 교회가 지속적인 신자 증가와 사회적 역할이 증대되는 등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시사(示唆)하는 표지(標識)가 되었다. 원주교구에 이어 1966년, 마산교구가 1969년, 안동교구가 탄생되었음이 이를 말해 준다.
또한 원주교구의 교구장에 한국인 주교가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적 비중을 감안한다면 서서히 한국 교회의 자립을 뜻하는 징표(徵表)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한국 교회는 외래 종교로서, 보다 까다롭고, 사회와 유리된 폐쇄적 종교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복장, 그리고 라틴어 미사와 라틴어 경문은 물론 교회의 모든 제도나 예식이 서양 것이었고, 교회의 재정 역시 외국에 의존해 오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원주교구는 다른 교구에 비해 일찍이 한국 민족 안에서의 교회 상을 구현하는데 앞장서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3) 원주교구 설정 당시의 국내 사정
원주교구 설정 당시 한국 교회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이해하고 받아 드리기에는 곤란(困難)한 부분이 많았음이 사실이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헌정(憲政)을 중단하고, 노동쟁의를 금지하며, 언론기관에 대한 규제조치를 강화하는 한편 군정(軍政)을 연장하였다. 그리고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외화를 조달하기 위해 미국과 월남에 '부대 파견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한일회담(韓日會談)‘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등 그 독재성을 드러내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더욱 억압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탄압에도 국민과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이 그칠 줄 모르던 상황이었다.
4) 원주 교구의 관할 구역
(1) 설정 당시의 관할 구역
원주교구 설정 당시의 관할구역은 강원도의 남부지역인 원주시, 원성군, 영월군, 삼척군, 정선군과 경북의 울진군 등 1개 시 5개 군으로 교세는 13개 본당과 교우 수 13,390명이었다. 그리고 교구 소속 성직자는 한국인 9명과 11명의 골롬바노회 소속 신부 등 20명이었다.
1965년 6월 29일, 원동 성당이 주교좌 성당이 되고, 지학순 신부의 주교 성성식과 원주교구 설정 및 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되므로 써 원주교구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는데, 지학순 주교는 한국인으로써는 열 번째 주교이다. 이같이 교구장에 취임한 지학순 주교의 문장(紋章) 표어는 ‘빛이 되라’이다.
(2) 교구 관할 구역 조정
이 당시 원주교구의 관할 구역은 교통이 매우 불편한 산간 벽지에 있는 소도시, 농촌, 어촌, 광산촌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회ㆍ경제ㆍ문화적으로 낙후된 곳이 대부분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취임하는 즉시 교구 관할구역을 사목방문한 바 그것은 사목하기에 매우 불합리한 관할구역으로 국가 행정으로나 교통 면에서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점들이 많았다. 특히 관할 구역을 순방하려면 인근 춘천, 청주, 대구교구를 경유해야 탄광지역과 동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1968년, 주교회의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제시하며, 관할 구역을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주교회의는 이 건의를 받아 드려 인근 교구와 관할 구역을 조정한 바 교황청은 1969년 5월 1일, 춘천교구에서 횡성군과 평창군의 평창면, 방림면, 미탄면, 대화면. 청주교구에서 제천군, 단양군을 원주교구의 사목지역으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이로써 오늘과 같이 횡성, 풍수원, 평창, 남천동, 의림동, 단양 본당이 원주교구에 이관되었고, 그 해 6월 1일, 안동교구의 신설로 경북 울진 본당을 안동교구에 이양하게 됨으로써 설정 당시의 관할구역이 확대 조정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3.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
1) 바티칸공의회 참석
원주 교구장에 착좌한 지학순 주교는 1965년 9월 8일, 제 2차 바티칸공의회 마지막 회기인 제 4회기에 참석 차 한국인 주교 6명과 함께 로마로 출국하였다. 귀국하여 바티칸공의회 참관기를 가톨릭신문에 연재하는 한편 특별 성년 중 모든 성당을 전대사(全大赦)를 얻을 수 있는 참배성당으로 지정하고, ‘공의회에 대한 강론을 세 번 이상들을 때’ ‘주교 대미사에 참례할 때’ ‘성당 참배 중 신덕을 고백하는 기도(사도신경, 니체노신경, 아타나시오신경)를 드리면’ 성년 중 한 번 전대사를 얻을 수 있음을 발표하였다. 또한 모든 신부들에게 공의회 정신을 계몽하는데 적극 주력하여 모든 교우들이 각성하고, 쇄신을 통해 생황(生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공의회 정신에 따라 개신교와의 교회일치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또한 ‘세상의 빛이 되는 교회’를 이룩하기 위해 ‘문맹퇴치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한편 청소년자활대 합숙소를 지원하는 등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외국 원조에 의존해 왔던 교회를 자립하는 교회로 거듭 나게 하고자 각 본당에 본당 자치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꾸르실료운동을 도입하여 활력을 불어넣었다.
2) 교구의 방향 설정
(1) 사목 지침
지 주교는 교구 관내를 순방한 후 교구의 모든 이들을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단순한 구호사업이나 지원사업이 아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자신의 문장(紋章) 표어인 '빛이 되라'와 같이 세상에 끊임없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올바른 영향을 주어 세상을 선(善)에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하고자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첫째, 사회 전반적인 면에서 적극 참여하여 정신적인 지도적 위치를 갖자.
둘째, 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협조해 줄 수 있는 그들의 어버이가 되자.
셋째, 옳고 바른 것을 솔선 수범하여 다른 사람들이 추앙하는 목표가 되자.
넷째, 이렇게 선의의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자.
다섯째, 하느님의 새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맑고 아름다운 마음과 생활로 세상에 빛을 주게 하자.
는 사목지침을 세우고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자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며 이를 실천할 것을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당부한다.
(2) 사목 목표
지 주교는 자신의 사목지침을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행하게 된다.
첫째, 사제 연수
새로 탄생한 교구는 사제 피정, 지구 사제회의를 갖고 사제들의 결속을 다지며 신자들의 신앙 의식 계발을 위한 노력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사목연구회를 자주 가져 사목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해 지역적 특성을 감안하여 교구를 3개 지역으로 나누고 책임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책임 신부는 교구장의 지시에 따라 각종 회의 준비와 소집을 맡겨 수시로 그 지방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제연수를 통해 공의회 정신과 한국 사회 실정을 연수하므로 써 교회의 쇄신과 근대화를 활발히 추진하게 된다. 특히 이 사제연수는 이영희, 김병태, 김금수, 이문영, 김윤환, 김낙중, 박청산 등 각 사회분야의 전문 교수들을 강사로 초청하여 년 수차래 진행하였으나 사제들의 인식 부족으로 이 연수회는 지속되지 못했다.
둘째, 교회 운영의 자립화
원주교구는 외국 선교회인 골롬반회가 관리하던 춘천교구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자연 교구의 사목과 재정을 골롬반회 소속 외국 선교사와 외원(外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지 주교는 1966년 11월 25일, 사목교서 ‘의욕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을 행동화하자’를 발표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1년 동안의 신앙생활 7가지를 들어 반성하자고 제언(提言)하는 서언(序言)과 교구의 경제 실정과 계획, 우리 자녀에 대한 책임, 전교사업에 노력할 의무, 성경과 교회 간행물의 구독에 대하여, 결어(結語)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 주교는 이 교서를 통해 특히 교구의 재정 실정과 계획을 소상히 밝혔는데 지난 1년 반 동안의 교구의 총 경비 중 교우들의 부담은 전체액수의 40분의 1에 해당하며, 교우 1인이 낸 돈은 30원으로서 한달 평균 한 사람이 1원 66전, 한 주일에 42전이라고 제시하면서 교구에서 교우 1명을 위하여 소비한 돈이 1,760원이므로 교우 각 사람은 1,730원씩을 하느님 앞에 빚지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 모든 본당 운영의 자립을 촉구하였다.
셋째, 평신도 지도자 양성과 단체 조직
1) 평신도 교육
교구의 자립과 평신도 중심의 운영을 실현하고자 한 지 주교는 아직도 교회는 성직자들에 의해 존립한다는 전통적 교회관(敎會觀)에 젖어 있는 신자들의 의식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함에 따라 평신도의 교육과 단체 조직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그 첫 단계로 '본당 지도자 교육'을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에 실시한 후 1969년 초부터 본당 사목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그 해 연말에는 교구 사목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전 교우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체 교육’을 본당과 교구 사목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년 2회 1박 2일의 의무교육을 1970년부터 1972년 중반까지 실시하게 된다. 특히 이 기간 중에 꾸르실료 운동을 도입하여 꾸르실리스타들이 본당과 공소에까지 파견되어 ‘전체 교육’에 참여하게 한다. 세 번째 단계로 1972년 8월부터 청년, 부녀 등과 농민, 노동자 등이 참여하는 ‘계층별 교육’을 실시하여 이후 각 본당에 청년회, 부녀회를 조직하게 한다. 그리고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를 적극 지원하여 노동자와 농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권익 신장을 위한 조직 활동을 촉진시키게 된다.
2) 본당 자치위원회 구성
또한 지 주교는 교우들의 성실한 신앙과 본당 운영 및 외교인 전도를 촉구하였다. 이에 1966년 12월 4일, 주교좌인 원동 본당에서 자립하는 본당을 목표로 자치위원회를 최초로 결성하였다. 그리고 교회 전반에 걸친 협의체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하느님 백성으로써 교우들의 교회를 이룩하려고 하였다.
당시 최창규 주임신부는 1968년도 ‘우리 본당의 사업계획’에서 ‘작년에 자치본당으로 출발한 우리 본당은 --교회 운영 면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던 것은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라는 여러분의 자치정신의 발로였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라며 본당사업을 완수하는데 앞장서자고 역설하였다.
이 자치위원회는 1968년 7월 23일, 한국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가 결성되자, 원동 본당에서는 12월 15일, 사목위원회 설립회의를 최창규 신부가 배석한 가운데 김교환 회장의 사회로 개최하였다. 이날 회의는 모두 290여 명의 교우들이 참석하였는데 최창규 신부의 사목위원회 설립 취지 설명에 이어 정관을 심의 통과시켰고, 임원단을 선거하였다.
이와 같이 본당의 평신도 조직을 처음 2년 동안은 자치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던 것을 1969년 1월 1일부터는 개편된 사목위원회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 원동 본당 사목위원회의 총원은 7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본당 운영에 참여하면서 점차 본당 사목계획을 작성하고, 예비신자 및 일반 교우들의 교리교육과 전교까지 담당하였으며, 주보 편집과 교무금의 책정과 징수 등 재정 집행까지 맡아하는 등 본당 운영에 평신도들의 참여 폭을 넓혀 나갔다. 이 사목위원회는 훗날 사도회로 개칭되면서 신앙의식 계발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된다.
교구 내 모든 본당에 ‘본당사목위원회’가 조직되고, 공소에는 ‘공소사목위원회’가 구성되어 운영되면서 각 본당 사도회 임원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위한 강습회(1969.10.
24~25)를 개최하게 된다. 그리고 교구 사목에 대한 협의를 통해 교구장을 자문하고 지시된 사항을 집행하기 위해 1969년 12월 17일, ‘교구사목위원회’를 창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 ‘교구사목위원회’는 본당사목위원회의 지원과 조정, 본당사목위원 및 일반 신자의 교육, 교구 사목상 필요한 건의 등을 하게 되는데 총 위원 수는 42명(사제 6명, 수도자 5명, 평신도 31명)이다.
3) 평신도 단체 조직
(1) 사목위원회 지도반
지 주교는 각 본당의 사목위원회 업무를 지도하기 위해 사목위원회 지도반(지도신부 : 이영섭 신부, 강사 : 교구 사목위원회장 장화순, 김영주, 장일순)을 편성하고 1970년 4월 14~18일에 교구 내 4개 지역에 파견하여 '지구사목윈원회' 결성에 도움을 주도록 했다.
(2) 교구 전교분과 연합회
한편 1970년 4월 23일, 전교분과 연합회를 조직하여 전교담당 수도자 20여 명에게 전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수도자로써의 지식 함양과 전교 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3) 가톨릭노동청년회(J. O. C)
가톨릭노동청년회는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의 가치와 그들의 사명을 깨닫게 하고 그들의 환경을 개선시키려는 목적으로 창설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1958년 1월에 도입되었다.
당시 강원도에서 J. O. C가 최초로 조직된 것은 장성 본당 주임으로 봉직하고 있던 이영섭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서 이다.
이영섭 신부는 전국 본부의 박수길(요한) 회장의 소개로 J. O. C 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춘천교구 관할이었던 장성지역은 광산지대여서 노동자들도 많고, 생활이 무질서하였다. 이영섭 신부는 장성광업소 종업원 8명과 접촉하여 1962년 10월 17일, 예비 팀을 구성하므로 써 춘천교구 J. O. C의 발족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준비기간을 거처 1963년 7월에 선서를 하므로 써 춘천교구의 첫 투사가 되었다.
이 장성J. O. C는 1965년, 원주교구 설정으로 원주교구 소속이 됨에 따라 기록상으로는 원주교구 최초의 본당 J. O. C이다. 그리고 교구 J. O. C는 1965년 10월 1일, 발족하게 되는데 초대 남회장 심상범(스테파노), 여회장 유순심(도로테아)이고, 지도신부는 이영섭 신부이다.
그리고 지 주교께서는 1969년부터 1975년까지 전국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 주교를 역임하셨는데 1970년 1월, 원주교구J. O. C가 중심이 되어 원주교구 관내 광산 노동자 실태조사를 실시하게 한다. 그리고 이영섭 신부가 1971년 4월 13일, 원동 주임에 부임함에 따라 원주 시내의 주요 청년들을 많이 입교시키는 한편 원주에서의 J. O. C 활동을 강화하여 1971년 5월, 원주 시내의 제사공장 등에서 근로하는 교우 청소년들로 본당 J. O. C(회장 : 유순심)를 조직하게 한다. 한편 원주교구J. O. C 4대 회장 이창복(요한보스꼬, 1970.2~1971.11)은 1971년 10월, 전국 회장에 선임되어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4) 청년회
지 주교는 1971년도 사목방침으로 각 본당에 청년회를 조직할 것을 권유하였다. 원동 성당의 경우 이영섭 신부의 지도를 받아 청년들이 활동하던 ‘성모성심’ Pr. 단원들을 중심으로 본당 청년회를 새로 발족(발기인 회장 : 최규택)시켰다. 이 원동 청년회는 이 해 10월 5일부터 전개된 교구의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 후에 개최된 ‘부정부패 규탄 궐기대회’의 준비와 진행에 전위적(前衛的)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11월 21일,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회장 이경국(안드레아), 부회장 최규택(야고보), 안영선을 선출하였다. 이 청년회는 ‘본당 예술제’를 주관하는 등 각종 본당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청년회는 1972년 8월 20일, 발족된 교구 청년연합회(회장 : 이경국)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후 일어나는 교구의 사회정의구현를 위한 여러 활동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특히 지 주교는 1971년 12월, ‘교구 청년회 활동에 관하여’라는 사목교서를 통해 ‘청년회는 저소득층과 근로 계층의 생활개선과 사회정의 실현에 있어 제일선 조직 자로서 근로대중에 대한 협동조직 활동의 전위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교회의 사회 활동에 있어 주도 세력으로 커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 건설에 매진함에 있어 형식주의, 추상성, 산만성, 오락 위주의 사고를 배격’하라고 역설하였다.
(5) 부녀회
또한 여성들의 자질향상에 역점을 두어 본당 운영에 여성들의 참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본당에 부녀회를 조직할 것을 권유하였다. 1971년 12월 5일, 원주지구 내에서의 가톨릭 부녀자들의 유기적 관계를 도모하도록 하고, 평신도 사명을 조직적으로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원주지구부녀회(회장 : 이인숙 프란치스카, 지도신부 : 안승길 로벨또, 기 굴리엘모)를 조직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성들로 하여금 레지오 마리애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하여 자녀들에 대한 교육, 불안 극복, 세계 평화, 교구 발전을 위해 성모님께 열심히 묵주신공(黙珠神功)을 드릴 것을 권장하였고, 신학생들을 위한 성미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6) 군종후원회
당시 원주에는 1군사령부가 있는 등 많은 부대들이 있었다. 따라서 원주를 중심으로 장병들의 신앙심과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한 군종 활동을 하는 장교들이 많았다. 교구는 이 군종 업무를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 1971년 2월 14일, 원주교구 군종신부단 후원회(회장 : 이우근)를 발족시켰고, 이 후원회를 중심으로 부대 내 공소를 이끌어 가는데 도움이 될 성경, 기도서 등을 지원하게 한다. 그리고 후에 군종 장교를 위한 꾸르실료도 실시하게 된다.
(7) 꾸르실료운동
가. 도입 과정
지 주교는 새로운 교구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5월 4일, 한국에 새로 도입된 꾸르실료 운동을 교구에 도입하고자 1967년 8월 17~20일까지 개최된 서울 제 2차 꾸르실료에 장일순 요한을 참석시켰고, 이 해 8월 24~27일까지의 제 3차 꾸르실료에 최창규 바르톨로메오 신부를 파견하므로 써 올바른 평신도상 정립을 위한 원주교구 꾸르실료 운동의 효시가 되게 한다.
이후 서울 제 4차에 장화순, 신동익, 조태원, 김정하 형제를, 인천 2차에 노세현 마티아 신부를, 서울 5차에 김용연, 조필환 형제를, 인천 3차에 이계열 형제를, 서울 6차에 신균섭, 황운집, 백성권 형제를, 서울 8차에 유호, 황주익, 최병완, 최규창 형제를 추천하여 수강하게 한다. 이렇게 3년 간 준비하던 중 1970년 신년모임에서 원주교구 꾸르실료 개최를 결정하고, 이해 3월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6개월 간 장일순, 김용연 형제를 서울 꾸르실료 지도자학교에 참석시켜 원주교구 꾸르실료 개최를 준비하게 된다.
드디어 1970년 7월 30일~8월 2일까지 남성 제 1차 꾸르실료(회장 : 서울 김기철, 부회장 : 장일순, 지도사제 : 교구장 지학순 주교)를 당시 단구동에 소재하고 있던 진광중학교의 교실을 성당, 강의실, 숙소, 임원실 등으로 꾸며 개최하게 된다. 이 때 참석자는 사제 6명(정 레오, 이흥근 마르코, 조 필립보, 양대석 알로이시오, 이영섭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현봉 안토니오 신부)과 22명의 평신도가 참석하였다. 그리고 8월 3일, 꾸르실료 사무국(주간 : 장일순 요한, 지도신부 : 이학근 베네딕토 신부) 설치를 승인하였다.
어려운 가운데 주님의 은총으로 탄생한 사제와 평신도 꾸리실리스타들은 이영섭 신부와 장일순 형제를 중심으로 강의와 임원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1970년 8월 31~12월 31일까지 단구동 성당(주임 : 이영섭 신부) 사제관에서 지도자학교를 운영하여 1971년 1월에는 3차에 걸친 꾸르실료를 개최하게 된다. 그리고 1971년 1월 25일, 제 1차 울뜨레아를 가톨릭센터에서 개최한다.
특기할 것은 남성 3차에 참석했던 춘천교구장 박 토마 주교의 요청으로 1971년 6월 22~26일, 장일순, 신균섭, 김용연, 김인성, 이우근, 김정하, 조태환 형제가 한 팀이 되어 춘천교구 남성 1차 꾸르실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당시 지 주교께서 지금의 군종교구의 전신인 군종단 총재 주교이셨기 때문에 전군 가톨릭 장교단 소속 신부들을 위한 군종 제 1차 꾸르실료(회장 : 김용연, 지도신부 : 1군사령부 군종참모 김득권 신부)를 1972년 1월 20~23일까지 개최하여 군종사목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가정 성화와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여성 꾸르실료 도입을 끊임없이 추진하였으나, 당시만 해도 여성들이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으므로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사무국 지도신부였던 안승길 신부는 서울 사무국 여성부와 계속 접촉하여 1977년 5월 12일부터는 여성 1차 꾸르실료(회장 : 서울 권홍자 자매, 지도신부 : 안승길 로벨또 신부)를 개최할 수 있었다.
나. 주요 활동
초기 꾸르실료 운동 중 중요한 점은 꾸르실리스타들이 각 본당 순회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교구의 사회정의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즉 꾸르실료를 수료한 사제와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자립하는 본당, 자립하는 교구를 만들자’라는 목표아래 안승길, 최기식 신부와 장일순, 이우근, 장화순, 김인성, 김용연, 김영주, 황주익, 최규창, 이경국, 최규택, 김정하, 박재일, 이계열, 장만자 등을 중심으로 2~3명씩 팀을 구성하여 각 본당을 순회하며 신자교육을 실시하므로 써 본당의 재정자립과 평신도들의 역할을 깨우치는 한편 활동단체를 구성하도록 지도하였다.
그리고 많은 꾸르실리스타들이 1971년 10월의 부정부패 규탄 결의대회, 지학순 주교ㆍ신현봉ㆍ최기식 신부 구속 사건 등을 겪으면서 원주교구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이창복, 박재일, 김상범 등이 전국가톨릭노동청년회와 한국가톨릭농민회의 주요 임원을 맡으면서 전국적인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 대변에 앞장서게 된다. 또한 김용연, 장상순, 김인성, 김영주, 박재일, 이경국 등이 신용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현 생활협동조합), 박재일이 한살림운동 등 협동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3.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교회
지 주교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 일치운동을 실천에 옮기는 한편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는 사목지침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 안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며,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게 하여 협동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광학교를 설립하고, 가톨릭 기숙사 및 교육원을 운영하여 자라나는 학생들의 교육과 신자들의 재교육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들의 의식계발을 위한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또한 원주와 제천에 가톨릭센터를, 황지에 노동회관을 그리고 원주에 방송국을 세워 지역 문화 창달에 기여하게 한다. 한편 원주에 성바오로병원, 정선에 성 프란치스코 의원, 삼척에 성 요셉의원 그리고 원주가톨릭병원을 설립하고, 농촌 탁아소 운영, 벽지보건사업, 복지관 건립 등을 전개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의료와 복지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를 조직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도록 하는 한편 남한강유역의 대홍수를 계기로 재해대책사업윈원회(사회개발위원회)를 설치하여 이 후 도시와 농촌과 광산촌 그리고 어촌에 협동작목반, 신용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 등 협동사업을 조직화하여 스스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그들의 의식을 계발하여 지역 사회 안에서 지도적 위치를 갖도록 하는 등 지역민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면서 차츰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1) 교회일치운동
지 주교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반포된 교회일치운동에 관한 교령(敎令)에 따라 1966년 3월 원주지구 기독교 목사회에 양대석 신부, 오 미카엘 신부와 함께 참석하여 ‘과거의 잘못들을 잊고 원주지구에서도 서로의 일치를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후 1967년 8월 7~12일, 황지성공회에서 개최된 제 2회 산업전도문제 연구회에 전국J. O. C 지도신부 박성종 프란치스꼬 신부와 당시 장성 주임이며 원주교구J. O. C 지도신부인 이영섭 신부가 참석하여 성공회 신부, 장로교ㆍ감리교 목사 등과 교류하게 된다. 또한 이영섭 신부는 전국 산업선교회 임원으로 박성종 신부와 참여하여 개신교 측과 함께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영섭 신부는 지 주교의 허락을 받아 원주지구 목사들의 모임인 원주기독교연합회에도 가입하여 목사들을 주교관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는 등 자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지 주교는 1970년 1월 17일, 가톨릭센터에서 시내 각 기관장 및 종교계 인사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지 주교는 ‘교회 일치운동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발전과 우리 민족의 번영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평화 위에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후 신ㆍ구교가 상호 교류하며 개신교 목사가 성당에서 설교하며, 신부가 예배당에서 강론하는 신ㆍ구교 일치합동기도회 등을 개최하므로써 교우들이 사회 전반적인 면에서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한편 교회가 지역사회 안에서 정신적인 지도적 위치를 갖고자 하였다.
1972년 1월 24일, 일치주간에는 원주교역자연합회 주최로 원주 시공관에서 조효운 박사를 초청하여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ㆍ구교일치합동기도회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원주에서의 교회일치운동은 신현봉 신부 구속 사건인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있은 3.1절 기념미사에서 발표한 ‘민주구국선언’에 앞서 1월, 원동 성당에서 개최된 신ㆍ구교 일치주간 행사에서 ‘원주선언’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2) 기숙사 건립과 교육원
지 주교는 타지방에서 원주로 진학한 남학생들을 위해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도움을 받아 1966년 8월, 가톨릭기숙사를 개운동 255-2번지에 착공하여 1967년 8월 19일, 2층 200평 규모의 건물을 완공하여 개관하게 된다. 그러나 1973년도에는 학생들의 이용도 감소로 기숙사를 폐관하고, 교육원으로 그 사용을 변경하여 10여 년간 사용하면서 교구의 꾸르실료 등 신자 재교육과 노동자, 농민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위한 각종 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의 장소로 그리고 공소사목부(1978년 1월 1일 신설)와 가톨릭농민회(1976년 2월 5일 창립), 신용협동조합 강원평의회 사무실로도 이용하게 한다. 특히 이 개운동 교육원은 지 주교 구속사건으로 1974년 9월 23일, 전국에서 300여 명의 사제들이 모여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는 등 한국 민주화에 크게 공헌한 기념비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교육원은 건물의 노후화로 1978년 10월 6일, 봉산동 성당 옆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후 이 건물은 소비자협동조합 강원지부와 원주농민회, 한살림 생협 사무실 또는 개인에게 임대하기도 하였다. 현재 과거 강의실은 한살림생협이 사용하고 있고, 본 건물은 2003년 7월부터 원주지역 저소득층의 자활ㆍ자립을 돕는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산하 원주자활후견기관이 사용하고 있다.
3) 원주ㆍ제천 가톨릭센터 건립
지 주교는 자역사회의 개발과 문화 향상에 공헌할 목적으로 원주가톨릭센터와 제천가톨릭회관을 세웠다.
원주 가톨릭센터는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와 뉴욕 대교구 및 그 외 외국 단체의 도움으로 1967년 10월에 착공해서 3층 건물(대지 330평, 연건평 224평)을 1968년 7월에 준공하여 12일에 교황대사 로똘리 대주교, 김수환 대주교, 이효상 국회의장, 원주시장, 1군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이 센터는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세워졌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 이 센터는 시민문화가 황무지였던 원주시민들의 생활의식 구조개선, 정서적, 문화향상에 기여하며 또한 가톨릭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세워졌다. 각종 문화사업으로써의 전시회, 문화교실, 연극, 음악발표 와 직장인과 일반인들의 위한 영어와 일어, 중국어 강좌 그리고 직장인 교리 강좌 등 각종 교양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공간이 협소하여 1970년 12월 23일, 식당과 다방(1989.12.31 폐쇄)을 증축하였고, 기존 강당을 헐고 그 자리에 1981년 5월 12일, 신관 반지하 4층(건평 513평)을 증축하여 확장하였다. 이 신관은 대강당이 있어 각종 강연회와 연극 등 각종행사와 예식장으로 제공되었고, 3층과 4층은 교구청으로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기할 것은 1971년 8월 31일, 이곳에서 창립된 원주밝음신협에 사무실을 10여 년 제공하므로 써 서민들의 고리채 해결과 저축 함양에 힘쓰는 한편 협동조합 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하도록 한 점이다.
이 센터는 2004년에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다면 오늘의 원주에 많은 문화 공간이 생기면서 시민들의 이용이 현저히 격감한 점이다.
이같이 원주의 가톨릭센터가 시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자 제천에도 가톨릭회관(대지 263평, 건평 452평)을 건립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역시 이 제천회관도 제천에 다른 많은 문화 공간이 생기면서 시민들의 이용이 격감하여 현재는 가톨릭복지관으로 전환되었다.
4) 진광중ㆍ고등학교 설립
일찍이 원동 성당에서는 1909년 1월에 부임한 제 5대 조제 신부에 의해 성당(현 가톨릭센터) 부속 건물에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설치하여 장차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1910년 8월 28일,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한 바 있다. 그리고 1931년, 당시 주임인 정규량 신부가 구 성당(현 가톨릭센터) 자리에 4년제 강습소인 소화학원을 설립하였고, 1934년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소화학원은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어 이 또한 학교 설립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 같은 학교 설립의 꿈은 6.25전쟁 이후에도 있었다. 제 17대 이 바드리오 신부는 1952년, 교우 유지들과 의논하여 당시 원주 시내에서 운영되고 있던 성육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여 중학과정으로 전환하고자 현 봉산동 성당과 복지관 일대의 교회 땅과 인접한 토지를 추가로 구입까지 하였으나 당시 춘천교구장 구 토마스 주교가 6.25전쟁으로 공산군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압송되었고, 교구장을 대리하고 있던 오 후벨또 신부는 교구장이 부재중이므로 보류하도록 하였다.
구 토마스 주교는 1953년 7월, 휴전협정(休戰協定)으로 석방되었으나, 1954년, 교황사절로 귀국하여 주로 서울 사절관에서 집무하여 춘천교구의 관리는 오 후벨또 신부가 처리하였고, 이 학교 인수 문제는 계속 보류되어 갔다. 이같이 학교 설립 추진이 답보(踏步) 상태에 이르자 이 일에 동참했던 교우 유지들은 현재의 대성학교 설립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어 자연 교회의 학교 설립 추진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학교 설립 의지는 1965년, 원주교구 설정 후 당시 운영 난에 봉착한 단구동 소재 육민관학교 4학급을 1967년 9월 26일에 인수하여 11월 25일, 교명을 진광중학교로 변경하고, 11월 30일, 본관 2층 16교실의 축복식(건평 516평)을 거행하므로 써 그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69년 3월 27일,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진광학원을 인가 받아 1972년, 우산동에 학교부지를 매입하였고, 이 해 12월 29일, 진광종합고등학교 9학급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3년 9월 25일, 중학교 32개 교실과 고등학교 32개 교실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여 우산동으로 이전하니 이것이 곧 오늘의 진광중ㆍ고등학교이다.
이 진광고등학교는 인문계 학교임에도 1978년 11월 3일,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경제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직업과정으로 전자과, 배관과, 용접과, 자동차 정비과를 설치하여 취업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그러나 현재는 원주에도 직업훈련학교가 설치되고, 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함에 따라 이들 학과(學科)는 자연 폐과(廢科)되었다.
지 주교는 이 진광학교 내에 1969년 10월 13일, 협동교육 연구소(소장 : 장화순 교장, 부소장 : 김용연 교감, 간사 : 장상순)를 설립하여 전교생에게 연간 36시간의 협동교육을 이수하게 하고, 지역사회에 협동조합을 보급하기 위한 교도사업(1970.1~1976.12)과 신용협동조합 소개 교육(96개 단체)을 실시하여 42개의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게 한다. 그리고 한국 신용협동조합 연합회(현 중앙회의 전신) 강원지구 평의회(현 도지부의 전신)의 창립을 도울 뿐만 아니라 교육원 내에 그 사무실도 마련하여 주었다.
5) 의료시설 설립
0.삼척 성 요셉의원 - 지 주교는 춘천교구 소속인 성 요셉의원을 인수받아 삼척뿐만 아니라 영동남부지역과 경북 울진지역 주민들의 진료에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성 요셉의원은 삼척의료원의 개원과 1981년, 골롬반수녀회 총회가 결정한 취지(학교나 병원 등 기관을 통한 간접선교가 아닌, 가난한 이들과 좀더 직접적으로 만남으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로 함)에 따라 1982년 2얼 28일, 폐쇄되었다.
0.성 바오로 병원 원주분원 - 지 주교는 의료시설이 충분치 못하여 거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원주시를 중심으로 한 벽지 주민들과 생활이 어렵고 불우한 주민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하여 줄 것을 성 바오로 병원에 요청하였고, 병원은 이를 받아 들였다. 지 주교는 이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에 개운동 255-1 토지 1,070평을 무상 증여하였고, 수도회는 연건평 350평 콘크리트 2층 건물을 신축하여 1970년 10월 7일, 축복식을 거행하고 15일에는 병원을 개원하게 된다.
이 병원은 15년 간 1백만 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는데 그 중 약 절반이 무료 내지 시혜(施惠)환자들이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마다 원성군, 횡성군, 평창군의 무의촌에서 무료 이동진료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주 시내에 의료시설들이 확충됨에 따라 1985년 10월 31일, 개원 15년 만에 폐쇄하였다.
현재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이 병원 건물을 개축하여 ‘바오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1993년 5월, ‘바오로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영세민 자녀와 맞벌이 부부의 자녀 등 영유아보육사업을 하고 있다.
0.성 프란치스꼬 의원 - 지 주교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가 부산 성모병원을 폐쇄함을 알고 이들을 초청하여 1976년 5월, 정선에 성 프란치스꼬 의원을 개설하고 본당 사목도 담당하도록 한다. 이 의원은 정선지역의 가난한 사람들과 무의촌 이동진료를 담당하다가 정선의료원이 개설됨에 따라 1988년 2월, 폐쇄하고 양로원으로 전환되었다.
이 수녀회는 정선 본당에 진출한 후 1980년 9월에는 장성 본당에도 진출하여 유치원을 운영하는 한편 ‘소년소녀 가장의 집-하늘바라기 집’도 운영하고 있다.
0.가톨릭병원 - 지 주교는 원주 시내 빈민지역의 결핵환자들과 무의탁노인들을 진료하기 위해 마침 폐쇄된 성 요셉병원에서 진료활동을 하던 골롬반회 소속 독일인 하이디 브라우크만(白惠得) 수녀에게 원주에 오도록 요청하였고, 1982년 1월 9일, 원주가톨릭의원을 개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교관 앞 학성동 1023번지 내에 병원 건물을 짖도록 하였다. 이 건물은 1983년 9얼 5일, 착공하여 1985년 9월 9일, 연건평 501평의 건물을 완공하여 이전 개원하므로 써 오늘의 가톨릭병원으로 발전하였다.
하이디 수녀는 원주에 1981년 11월에 도착, 봉산동 현 가톨릭복지관 옆에 거처를 마련하고, 두 명의 자매와 함께 살면서 결핵환자들과 무의탁노인들을 순회 진료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살 것을 결심하여 기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 주교의 요청을 받아 드려 1983년 9월 11일, ‘전교봉사 수녀회’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의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이다.
6) 원주문화방송 설립
지 주교는 오랜 동안 매스컴의 사회적 역할이 지대한 점을 인식하였고, 또 방송을 통한 복음 전파와 홍보 매체를 통한 사회참여를 위해 방송국 설립 의지를 갖고 있었다. 1969년, 마침 원주에 방송국 설립 문제가 대두되자 5.16장학회와 합작으로 방송국 설립에 참여하게 된다. 이 방송국은 자본금은 교구에서 1,700만원. 5,16장학회가 1,300만원을 투자하기로 하되 주권 지분은 교구가 1,500만원의 현금과 방송국 장소로 가톨릭센터를 빌려 주기로 하여 40%를, 5.16장학회는 방송국 설립권과 문화방송 서울 본사 네트워크의 특권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여 60%를 갖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모든 절차는 5.16장학회에 위임하였고, 회사의 운영은 5.16장학회 측에서 대표이사와 비상임 이사 1명과 감사 1명, 교구에서 전무이사(현재 이 직제는 폐지됨)와 감사 1명으로 구성하기로 약정하고, 1969년 9월 9일, 체신부장관으로부터 방송국 설치허가를 받게 되는데 상호는 원주방송주식회사(대표 : 이양호. 호출부호 : HLSK. 주파수(102.2Mhz 초단파, 1590Khz 중파)와 출력 1Kw)이다. 그리고 1970년 7월 9일, 자본금 1천만 원으로 하여 설립 등기를 마친 후 7월 25일, 가톨릭센터 2.3층을 임대하여 방송기기를 설치(AM송신소 장비)하여 9월 19일, 라디오 방송(약칭 wbc. 라디오 원주)을 당시 원주 실내 체육관에서 개국 기념식 및 기념공연을 하므로 써 개국하게 된다. 이 때 한국문화방송과 제휴를 하게 되어 12월 22일, 주파수를 1300Khz로 변경하였고 1971년 9월 9일, 원주방송주식회사를 원주문화방송주식회사로 상호(약호 MBC)로 변경하게 되며, 10월 1일, MBC네트웍 가맹사로 제휴를 맺고, 10월 19일, 주주 이양호의 주권을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 사장 이환의 명의로 변경하여 한국문화방송(주)이 주식 60%를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12월 2일 주주 지 주교는 원주 MBC의 운영실태 감사를 제의하게 되고, 12월 28일, 주주 김영주, 안승준의 주식(각 2,000주) 4,000주를 재단법인 천주교원주교구유지재단 이사장 지학순 명의로 변경함에 따라 천주교에서 주식 40%를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원주 MBC는 1977년 중앙동에 신 사옥을 준공하여 이전하여 1984년 6월 30일, 백운산에 TV중계소를 개국하게 하였으며, 1988년 12월 16일, 현재 학성동 소재 사옥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주식 증자를 4회에 걸쳐 증자함으로써 현재의 총자본금은 1,258,500,000원이다. 이상이 원주문화방송의 약사이다.
이 같은 과정으로 설립된 원주 MBC는 지 주교가 방송국 설립에 참여하면서 출현할 자본금조달을 위해 본국에 휴가를 간 교구 소속 외국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 1,500만원을 구해 올 것과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후일 갚을 터이니 차용해 갖고 오도록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는 등 자본금 마련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지 주교가 필립핀에서 개최된 아세아 주교회의 참석한 후 매스컴 관련자들과 환담하는 과정에서 1,500만원을 투자하였다면 지금의 주파수(102.2Mhz 초단파, 1590Khz 중파)와 출력 1Kw 보다 규모가 큰 방송국을 설립할 수 있다면서 무언가 착오가 있었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듣게 된다. 이에 지 주교는 회사에 대한 감사를 실시한 바 부정과 비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한 시정을 5.16장학회에 계속 촉구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으므로 청와대에도 진정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진정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자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 것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1971년 10월 5일부터 3일간에 걸쳐 전개된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규탄 결의대회의 한 촉매가 되기도 한다.
7) 재해대책사업
지 주교는 특히 교구의 활동 목표를 ‘새로운 신학의 토대 위에서 사회정의의 구체적 실천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저소득층(低所得層) 근로계층(勤勞階層)에 속하는 절대다수의 가난한 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이 바로 이 세상에 주인임을 깨닫고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되찾아 생활과 현실을 항상 개선하도록 복음을 전하며, 실제에 있어 그들을 협동생활에로 조직 고양하여 구체적인 생활의 진보 속에서 그리스도를 육신화(肉身化)시키는 곳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 같은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기본 신앙생활교육, 인간의 기본권과 올바른 사회 건설의 참여를 위한 교육과 청년회, 부녀회 등 교회내 각 단체들의 조직 강화 그리고 광산노동자, 농어민, 영세상인, 소도시 빈민과 저소득봉급생활자(低所得俸給生活者) 및 하급관리에 속한 교우들과 기타 일반 대중들에 대한 다양하고 보다 강력한 협동조직활동을 일으켜야 함을 기본 과업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많은 고뇌를 하게 된다. 새마을운동 사례들을 수집하고, 부농을 이룬 선진 농업기술인들과 협업농장 등의 사례들을 수집한다.
(1) 재해가 발생하다.
지 주교는 이러한 목표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사목지침으로 또는 서한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는 한편 4개의 지도반(지도신부 외 평신도 3명이 한팀)을 편성하여 각 본당 수련회(강의 내용 : 평신도의 사명, 올바른 신앙생활, 협동과 은총의 생활, 정의와 평화의 해의 의의 그리고 노래, 서사, 예절을 포함)를 개최하여 나가던 중 1972년 8월 19일, 남한강(南漢江) 유역에 집중호우(250mm)로 대홍수가 일어나 교구 관내 9개 시ㆍ군(강원도 원주시, 원성군, 횡성군, 평창군, 정선군, 영월군, 삼척군, 충북 단양군, 제천군)과 인접 4개 시ㆍ군(충북 충주시, 중원군, 경기도 여주군, 양평군)의 농가 1천 호와 탄광지대의 8천여 명이 실직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전국적인 피해상황은 총 피해액 180억 원, 건물도괴 2만3천 동, 농경지유실 5만8천 정보, 수재민 14만5천명으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지 주교는 신부들에게 서한을 통해 이번 수해를 통해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동안 교육을 통해 강조해 온 공동체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본당의 단합된 힘을 통해 좋은 모범을 보여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본당 사목회장과 교구 단체 책임자들에게도 서한을 통해 60년만의 물난리로 집과 전답을 잃고 신음하는 수재민들이 추운 겨울을 넘기는데 따른 문제들을 잘 살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도움을 주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간 집계된 교구 내 수해피해상황 집계표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별표와 같다.
원주교구 관내 수해피해상황 집계
구분 | 피해액 | 가옥피해 | 인명피해 | 농지유실매몰 | 이재민 | ||||
유실 전파 |
반파 침수 |
계 | 사망 실종 |
부상 | 계 | ||||
단위 | 억원 | 동 | 동 | 동 | 명 | 명 | 명 | 정보 | 명 |
원주시 | 1.5 | 39 | 1,550 | 1,589 | - | 4 | 4 | 33.5 | 8,117 |
원성군 | 16.6 | 401 | 637 | 1,038 | 18 | 22 | 40 | 1,137 | 21,435 |
횡성군 | 5.5 | 32 | 82 | 114 | 3 | 3 | 6 | 309 | 684 |
평창군 | 7.2 | 145 | 1,068 | 1,213 | 5 | 1 | 6 | 573.5 | 4,249 |
정선군 | 9.8 | 1,166 | 726 | 1,892 | 9 | 1 | 10 | 651 | 7,141 |
영월군 | 18.0 | 1,061 | 2,065 | 3,126 | 11 | 5 | 16 | 853.7 | 27,788 |
삼척군 | 10.0 | 487 | 951 | 1,438 | 6 | - | 6 | 140.9 | 15,558 |
단양군 | 44.7 | 1,634 | 1,599 | 3,233 | 9 | 291 | 300 | 272.3 | 15,404 |
제천군 | 22.0 | 1,030 | 377 | 1,407 | 5 | 3 | 8 | 936.7 | 8,353 |
총 계 | 135.4 | 5,995 | 9,055 | 15,050 | 66 | 330 | 396 | 4,927.6 | 108,729 |
(2)구호를 요청하다.
이같이 교구 내외에 수만의 이재민(罹災民)이 발생하자 지 주교는 즉각 구호활동에 나서 식량, 의류, 천막, 약 1천만 원어치를 피해지역에 보내는 등 수재민을 계속 돕는 한편 피해상황을 세계 여러 나라의 가톨릭 구호단체에 알리고, 복구에 필요한 재원을 요청한 바 「서독 주교단」의 주선으로 서독 정부가 240만 마르크(2억9천8백만원)와「국제 까리따스」의 주선으로 「유럽 까리따스」가 51만 마르크(6천3백만원) 도합 291만 마르크(3억6천2백만원)를 지원해 주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게 된다. 이에 지 주교는 10월 20일, 오스트리아를 경유 독일을 방문하여 최종 결정을 보고 미국을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10.17계엄령으로 출국을 하지 못하고 계엄사령부에 의해 엄중한 감시 속에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지 주교는 사목서한을 통해 ‘친애하는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금년은 우리에게 많은 변화와 어려움을 가져온 해였습니다. 60년 내의 처음이라는 큰 수해로 많은 사람이 집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그 쓰라린 상처가 아물기에는 무서운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며, 남북 공동선언과 적십자 회합으로 우리는 가슴 설레기도 했고, 8ㆍ3긴급조치라는 사채동결에 따라서 우리의 경제생활은 큰 변동을 겪었으며, 이제 비상계엄령과 함께 정치적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고 더 좋은 사업을 통해서 교회를 빛내 보려는 생각에서 약 80만 달러(우리 돈으로 3억 2천만원)에 달하는 여러 가지 사업, 즉 수재민 구호사업, 진광학교 설립, 농민에게 소를 분양하는 사업 등을 오스트리아와 독일, 미국의 여러 단체와 미리 어느 정도 교섭이 되어 예정된 지난 10월 20일 한국을 떠나려 했으나 계엄령으로 출국이 허락되지 않아 이제는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갔음을 여러분과 같이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변화를 겪는 시기일수록 진리 속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감상적이고 패배적인 무기력한 자세에서 벗어나 진리의 빛을 따라 올바른 신심을 실천하는 생활을 합시다. 슬기롭고 꿋꿋한 자세로 어머니요, 선생님인 교회의 참된 모습을 사회에 보여 줍시다. --‘고 격려하면서 ’--기도 속에 서로 기억하고 위로 격려하면서 주안에 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렇게 지 주교는 생동감이 넘치는 교회,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고 모범이 되는 교회이기를 원하였다.
(3) 구호 요청 내용
당초 교구는 1천여 호의 농가에게 주택과 농기구 구입자금과 탄광 침수로 실직한 8천여 명의 광부 실업보조비로 무상지원하기 위해 원조를 요청하였다.
(4) 재해대책사업위원회 구성
다행히 지 주교는 11월 28일, 원주를 떠나 독일과 로마를 방문하여 수재민을 위한 원조금에게 대해 최종 합의를 본 후 12월 22일에 귀국하게 된다.
지 주교는 출국이 연기되어 수해복구사업의 착수가 2개월 여 지연되었고 또 혹한 기에 사업을 착수하게 되어 많은 어려움이 있게 되자 1973년 1월, 이 재해대책사업을 빠르고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재해대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① 재해대책중앙위원회
재해대책사업을 빠르고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천주교 원주교구장을 대표자로 하고 천주교 원주교구 사제대표와 집행될 지역을 관할하는 행정기관의 대표자 및 종교, 언론, 교육계 인사로 구성되는 재해대책중앙위원회를 조직하며 중앙위원회는 이 재해 사업의 추진 방침과 원칙을 결정하며 현안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
그 위원의 구성은
위원장 지 학 순 주교(천주교 원주교구장)
위 원 양 대 석 신부(천주교 원주교구 상서국장)
위 원 오미카엘 신부(천주교 문막본당 주임)
위 원 이 기 준 목사(원주 연합 기독병원)
위 원 전 영 춘 실장(강원도 기획관리실)
위 원 유 용 기 실장(충청북도 기획관리실)
위 원 엄 한 준 사장(원주문화방송주식회사)
위 원 장 화 순 교장(진광중ㆍ고등학교)
위 원 김 영 주 실장(원주교구청 기획실)
② 집행위원회
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사업 방침이나 원칙에 따라 사업을 추진 진행하는 실무를 담당하며 관계 행정기관 요원과 천주교 원주교구장이 임명하는 요원 약간 명으로서 구성한다.
③ 지구위원회
사업지구 군(郡)단위 별로 지구위원회를 둘 수 있으며 지구위원회는 사업지구 실정에 따라 알맞은 사업추진과 사업장 관리 지도 업무를 맡는다. 그리고 지구위원회는 본당 신부, 사목회장, 시군의 과장이나 읍면장, 수해민 대표, 목사, 그밖에 필요한 인사(비정치적)로 구성하며 지구위원회에 실무를 담당할 간사 1-2명을 둘 수 있다.
④ 기구표
재해대책중앙위원회 |
집행위원회 |
4-5명
지구위원회 |
간사 1-2명
지 역 별 |
⑤ 농부와 광부들을 위한 재해대책
재해대책위원회는 정부 예산으로 투자되는 것 외에 농민들의 자력으로 어려운 주택복구, 농경지 정리, 농기구, 종자 구입으로 서독 정부가 보내 온 240만 마르크를, 함백, 황 지, 장성, 영월, 정선, 삼척지구의 침수 탄광, 실업 광부의 실업보조에 유럽 까리따스가 보내 온 51만 마르크를 지원하는 등 교구와 지방 관민의 협조 아래 복구작업과 개발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재해대책사업은 우선 1단계로 긴급 구호식량 보조사업. 2단계는 전답복구 등 생산기반 조성사업. 3단계는 부락 개발사업. 4단계는 지역산업 개발사업으로 전환시켜 나갔다.
1단계 식량보조사업을 제외한 사업들은 모두 현금 지원사업으로 1년 거치 4년 상환 무이자 조건이었다. 3월초부터 6월까지 실시된 1단계 사업은 강원, 경기, 충북 3개도 87개면 2,822세대를 대상으로 1일 5㎏ 기준 36일분 양곡으로 428톤을 투입, 도로 보수, 하천 정리사업 등에 취로하게 하여 노임으로 방출하고, 75개 초등학교 아동 5,210명과 156개 탁아소 5,830명의 3개월 간 급식비로 5백 51만원을 보조함으로써 식량보조의 혜택을 주었다.
광부 지원사업도 긴급구호와 장기지원사업으로 구분하여 농민 식량보조사업과 함께 벌인 긴급구호사업 대상으로 취로하게 한 후 노임으로 양곡 29톤을 방출하였으며, 장기지원사업은 황지, 정선, 삼척 등지의 7개 광업소 광부 1만 2천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소득을 높일 수 있는 각종 소득사업을 지원하였다.
이들 모든 사업은 신용협동조합, 장학금고 설치와 한우사육, 양돈, 산양사육, 양어장, 약초, 특용작물 재배, 농기구 구입, 구판 사업, 농산물 가공사업 등 지역 풍토와 경영능력을 고려하여 협업형태로 현지 실정에 맞는 9개 사업에 1억 8천만을 투입하여 사업을 벌렸다.
이 모든 사업들은 ‘나는 이 돈을 여러분에게 전달했을 따름이다. 이제 이 돈은 사회기금으로서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쓰여지도록 함께 노력하는 일이 중용하다’는 지 주교의 정신에 따라 혈연, 종교나 이념,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사랑과 봉사의 자세로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필요한 사람에게 관심과 지원을 하게 되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수해농민 및 광산 근로자를 위해 펼친 사업을 개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수해복구사업(3개도 13개시군 87개 읍면)
*농촌지역 : ㉠ 긴급식량구호 : 90,300명 양곡 657톤
㉡ 전답복구 : 1,156세대 382㏊
㉢ 수리시설복구 : 153세대 97.5㏊
㉣ 소득증대사업 : 143부락
*광산지역 : ㉠ 긴급식량구호 : 22,404명 양곡 188톤
㉡ 장기구호 : 17,497명 3,500만원
㉢ 황지노동복지회관 건립지원 : 430만원
나. 개발사업
*농촌지역 : ㉠ 한우지원사업 : 68개 부락 1,168세대
㉡ 마을건강사업 : 35부락
㉢ 농촌신협육성사업 : 54개 부락
㉣ 농촌소비조합육성사업 : 38개 부락
㉤ 각종 농민교육사업:초청194회 6,500명, 현장 456회 17,800명
*광산지역 : ㉠ 신협육성사업 : 15개 조합
㉡ 소비조합육성사업 : 15개 조합
㉢ 각종 광산근로자 교육사업 : 158회 12,917명
이들 사업들은 우선적으로 재해민을 위한 지원사업이었으나 점차 농촌개발을 지원할 수 있었으며,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면서 구조적 모순을 타개하려고 힘썼다.
먼저 의식의 발전이 주효 하다고 판단하여 물질적 지원에 앞서 교육을 실시하고, 무상의 혜택에서 비롯될 수 있는 의존성을 탈피하도록 하기 위해 상호 협동하는 삶과 그 체계를 형성하도록 노력하였다.
낙후된 부락을 선정하여 공동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들을 하도록 지원하고, 협동정신을 일깨우려는 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구체적인 지원사업 이외에 한우작목반 형성이라든가 신용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 육성 등은 대표적인 성공사례라 하겠으며, 무엇보다도 각종 교육을 통한 의식개발과 잠재능력의 개발이라는 값진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재해대책위원회는 1979년, 사회개발위원회(1993년 12월 20일 사회개발사업 종료)로 개칭되어 운영되다가 1983년 사회사업국으로 1990년, 사회선교국으로 편제를 변경하여 사회개발부와 사회복지부로 나누어 복지사업 분야에 주력하였다.
현재는 이 사회개발부와 사회복지부의 기능이 하나로 통합되어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사무국으로 전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부정부패추방운동
1)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지학순 주교는 취임하자 교구 관내 전지역을 샅샅이 돌아보는데 2년이 걸렸다. 교구 관할 구역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영서 남부와 영동 남부에 해당하는 농촌과 광산촌 그리고 어촌 지역이 대부분으로 교통이 불편하여 주로 기차로 여행을 해야만 했다.
지 주교는 많은 농부와 광부 그리고 어부를 만나며, 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낙후해 있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문화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어두운 면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근본적인 원인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정부패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자신의 사목표어인 ‘빛이 되라’와 같이 세상의 빛이 되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2)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교회
그리하여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는 사목지침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 안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며,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게 하여 협동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광학교를 설립하고, 원주와 제천에 가톨릭센터를, 황지에 노동회관을 그리고 원주에 방송국을 세워 지역 문화 창달에 기여하게 하는 등 지역민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면서 차츰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3) 정치적 상황
원주교구가 탄생한 1965년의 정치적 상황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 정권이 민중을 억압하면서 경제부흥을 위한 외화를 조달하기 위해 굴욕적인 한일외교회담을 진행시킬 때이다. 교구장에 취임한 후 교구 관내를 한참 순방하던 때인 1966년은 석탄공사 하역작업 근로자 등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성이 끊이지 않았으며, 야당인사가 구속되고, ‘사상계’ 대표 장준하가 입건되는 등 박 정권의 독재와 인권 탄압이 더욱 심해져 학생운동이 거의 질식 상태에 빠질 때이다. 그리고 1967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지자 이를 무효라고 주장하며, 규탄하는 대학생들의 데모대와 경찰이 투석전을 벌리는 가운데 제 7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취임하는 등 정국 이 혼란한 때이다.
(1) 한국 주교단의 교서 발표
특히 1968년 1월 7일, 지난 해 2월, 강화도의 심도직물에서 일하고 있는 가톨릭노동청년회(J. O. C) 회원들이 노조결성 준비를 하자 회사측이 이를 방해하며, 주동자를 해고하고, 천주교회에 모여 대책을 협의하는 신자를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제까지 사회문제에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던 한국 주교단이 ‘우리의 사회 신조’라는 교서를 발표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접어들어 박정희 정권의 강압은 더욱 심해져 학생운동은 완전히 질식 상태에 빠진 반면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한편 원주교구의 관할인 장성탄광 광부들도 이해 1월 16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데모를 하였으며, 1월 20일, 황지 문곡지구 탄광 근로자 1,000여 명이 감원 반대, 체불임금 즉시 지불, 덕대제(德大制) 폐지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데모를 단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2월 28일, 영월탄광 광부 가족 2,000여 명이 폐광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는 등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데모와 농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영월 북면 마차(磨蹉)에 있던 이 영월탄광의 폐광은 영월지역의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로서도 많은 신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떠나야 했으므로 마차 성당을 7월 17일, 폐쇄해야만 했다.
(2)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
1969년 1월 8일, 공화당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공식 검토할 것을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재야 세력, 대학생들이 헌정수호선언문을 채택하고, 성토대회를 열며, 가두시위를 강렬하게 벌렸고, 7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로 정부의 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디. 이에 개헌반대투쟁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월 17일, 국민투표가 강행되어 27일, 3선 개헌안이 정식 공포되기에 이른다.
1970년도에도 박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대학생들의 시국선언과 단식 농성이 계속되었으며, 노동자들의 파업이 잇따르는 가운데 시인 김지하(金芝河, 영일, 프란치스코)가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시 ‘오적(五賊)’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서울 평화시장 종업원 전태일(全台壹)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전태일 분신사건은 이후 대학생과 노동계가 연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김지하의 구속과 전태일의 분신 사건은 새로 탄생한 원주교구를 정착시키기 위해 사목활동에만 전념하던 지학순 주교로 하여금 사회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3) 삥땅은 죄가 아니다.
지 주교는 1970년 어느 봄 날 한국노사문제연구소 박청산 소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박청산 소장은 원주 주교관으로 지 주교님을 찾아뵙는다. 그는 찾아 온 사연을 간단히 말씀드리며 지 주교님께 답을 구했다.
사연인 즉 어느 날 안젤라라는 서울 시내버스 안내양이 자신을 찾아 와 다음과 같은 고민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병 치료비와 동생의 학비 때문에 하루에 3백 원씩 삥땅을 하고 있는데 자신이 가톨릭 신자여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저지른 삥땅이 죄가 되는지 여쭈어 보려고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도 찾아뵙고 여쭈어 보았으나 모두 난감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찾아갔더니 그러한 문제라면 원주 지학순 주교님을 찾아뵙는 것이 좋게다 하여 찾아 왔습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가톨리노동청년회는 1961년 11월부터 버스 안내양들과 접촉하여 장시간 노동으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을 일깨워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5명의 안내양들과 모임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질문을 받은 지 주교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 주교는 대답을 바로 해주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한참 그 문제를 생각하였다. 얼마 후 방에서 나와 점심을 함께 하고 나서 지 주교가 답하였다.
'그런 경우 삥땅은 죄가 안됩니다. 안젤라 양은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 분명한 대답을 듣고 박청산 회장은 너무 기뻐서 이것을 하나의 사회문제로 삼아 심포지엄을 열자고 제안하였고, 4월 28일, 서울 YMCA에서 심포지엄을 열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 MBC 방송국의 임택근 아나운서가 심포지엄이 열리기 전날 아침 7시 뉴스쇼에서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대담 프로를 만들어 지학순 주교의 강연을 방송하기도 했다.
심포지엄은 많은 수도자들과 시민들, 그리고 여차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지 주교는 이 자리에서 ‘종교인의 입장에서 본 삥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삥땅이란 혹사당하는 차장들이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권리를 그들 나름대로 찾으려고 하는 당연한 권리주장이므로 종교적인 면에서 죄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4) 원주의 부정부패 규탄대회
원주교구는 1971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부정부패추방규탄대회를 원동 성당에서 개최하였는데 이 같은 대회를 갖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원주교구와 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가 공동으로 설립한 원주문화방송주식회사의 부정이 1971년 3월, 드러난 데서 비롯하지만 이미 지 주교는 1965년, 원주교구장에 취임하여 자신의 교구 관내를 순방하면서 만난 많은 농부와 광부 그리고 어부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낙후해 있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문화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만 되는 것이 정치인들 특히 정권의 가공할 부정부패와 사회의 부조리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은 이 땅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불의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되도록 해야 함을 절감한데서 비롯한다.
이 부정부패 규탄대회는 10월 5일, 오후 7시 30분 천주교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1,500여 명이 원동 성당에서 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사제단이 공동집전한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에 참석한 후 부정부패규탄궐기대회를 열어 국회, 정부,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선언문, 부정부패 규탄문,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부정부패 뿌리뽑자’ ‘사회정의 이룩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지 주교를 선두로 5명의 외국인 신부를 포함한 20여 명의 신부와 30여 명의 수도자, 1,500여 명의 교우들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기도 경찰의 제지로 9시 30분경 일단 성당 안으로 들어가 이 땅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불의가 사라지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되기를 기원하는 철야기도를 하면서 7일, 오후까지 비폭력적인 연좌 성토대회를 가졌다.
교구 신자들은 10월 7일, 오후 5시 3일간의 부정부패규탄대회를 일단 마치면서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부정부패추방운동을 계속할 것을 다짐하면서 정부 당국에 요구한 5개 사항을 재확인한 후 특별미사를 봉헌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이 특별미사 강론에서 현대 교회의 사명이 백성을 억압하는 불의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1.정치적 불의에 대한 인간 존엄성의 수호 2.조직화된 경제 불의에 대한 투쟁 3.소외 계층의 탄압과 연대의식의 고취 4.무감각을 극복하고 참여와 희망을 갖게 하자”는 네 가지 투쟁 목표를 제시하는 한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위해 일어나 강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는 농민, 서민 등 약자를 구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외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일깨워 주었다.
5) 부정부패 추방운동의 확산
이 부정부패 추방운동은 단순히 원주문화방송의 부정을 규탄하는데 만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악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운동은 전국 천주교회에도 확산되었고, 개신교를 비롯한 일반 시민단체에까지 번져 전국 각지에서 부정부패 규탄 시위가 잇따라 일어났다.
10월 18일, 지학순 주교는 성명서를 내어 “1.부정부패와 특권의 원흉을 처단할 것 2.위수령, 휴업령, 학생의 대거 연행, 체포, 입영조치 등 비인도적 조치를 즉각 중단할 것(10월 18일 각 대학 데모 주동학생 174명제적) 3.교회는 양심의 지시에 따라 오늘의 사태를 방관 내지 기피하는 패배주의와 감상적인 태도를 버리고 공동의 책임으로 양심의 소리를 외쳐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나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불의한 세력과 싸우는데 신명을 걸었으며, 우리 교회는 단합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또한 한국 주교단에서도 11월 14일,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라는 공동교서를 발표하여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유산 받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전달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고 선언하면서 “교회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대변자로서 공동선과 인간 존엄성 회복”에 앞장 설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 같은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규탄대회는 이후 원주가 1970년대에 있어 전국적으로 전개된 정의평화운동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4.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
1) 지학순 주교의 강제 연행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소위 ‘유신헌법’을 만들어 11월 21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 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 해 5월 1일, 김지하가 가톨릭교회의 종합지인 「창조」4월호에 ‘비어(蜚語)’를 발표한 것이 반공법을 위반하였다 하여 또 다시 입건되자,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지하는 도피생활을 하던 중 1974년 4월 25일, 전라남도 흑산도에서 체포되었고, 이 날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민청학련사건은 이 해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동맹(약칭 민청학련)이 ‘민중ㆍ민족ㆍ민주 선언’이라는 제목의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한 후 시가행진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무장기동대에 3백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이 날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날 청와대는 ‘민청학련은 불순한 반국가 세력과 결탁하여 폭력 데모에 의해 노동정권의 수립을 꾀했다’고 발표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1974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 기념미사에서 강론을 통해 ‘부자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의 생명도 고귀하다’며 분신 자살한 전태일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지 주교는 이해 4월 22일, 출국하여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회의와 필리핀에서 열린 매스컴 회의에 참석한 후 유럽을 순방하고 출국한지 76일 만인 7월 6일,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강제 연행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7월 8일, 김수환 추기경은 지 주교의 행방에 대해 여러 가지로 수소문하였으나, 확인이 되지 않자 주교단 상임위원회를 소집하게 되었고, 이어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하여 30시간 이상이나 조사를 받고 있음을 알고 오전 10시 50분경 지 주교를 접견하게 되었다.
그 때 지 주교는 김 추기경에게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행동으로서 학생단체들을 도와 줄 목적으로 가톨릭 시인 김지하에게 자금을 주었다. 그러나 공산단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내가 학생을 도와 준 행동은 공산주의와는 추호도 관계가 없다’고 강력히 말했고, 같은 날 교황대사도 지 주교를 방문하였다.
2) 지 주교를 위한 첫 기도회
7월 10일, 중앙정보부는 사람을 보내 김 추기경에게 주교회의 소집을 중지할 것, 전국에 배포한 유인물을 회수할 것과 박정희 대통령이 면담할 것을 전해 오자 김 추기경은 청와대로 대통령을 면담하러 가고, 오후 6시에는 전국 6개 교구(서울, 원주, 인천, 청주, 수원, 춘천)의 주교, 신부 200여 명, 수도자 400여 명, 그리고 많은 평신도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정의 평화와 지 주교를 위한 미사와 기도회’를 명동성당에서 갖게 되었다.
미사 후 성모동굴 앞에서 400여 명의 성직자, 수도자가 철야 기도를 강행하고 있는 동안에 박 대통령과 면담하고 서울대교구청에 귀청(歸廳)한 김 추기경은 연락을 받고, 밤 11시경 직접 중앙정보부로 가서 지 주교를 데리고 나왔지만 명동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원에 연금상태로 있게 되었다.
3) 지 주교의 양심선언
지 주교는 건강이 나빠지자 서울 후암동 동생 지학삼의 집으로 옮겼으나 계속 연금 상태였으며, 7월 15일, 당뇨병이 악화되어 기관원의 감시 하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이날 병원 밖으로 나와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신부와 수녀들과 외신기자들에게 배부했다. 지 주교는 이 성명서에서 ‘부정부패와 1인의 장기집권과 독재,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현 정부를 반대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7월 23일, 공판이 연기된 것을 모르고 상경한 원주교구 신자들은 병원 밖에서 연금상태에 있는 지 주교를 보기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지 주교는 병원 밖으로 나와 기도 중에 있는 신부, 수도자, 평신도 1백여 명과 함께 묵주 기도를 바쳤다. 이어 지 주교는 김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교우들에게 양심에 입각한 소신의 일단을 피력하면서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조작된 것이므로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발표하였고, 이어 지 주교는 다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4) 원주의 첫 기도회
7월 30일, 원주교구 사제 30명, 신자 1천여 명이 원동 성당에 모여 ‘사회정의와 교회쇄신을 위한 성년 특별기도회’를 개최하고, 고통받는 이와 지 주교를 위해 기도했다.
이후 각 교구와 교회 단체들의 기도회 개최와 성명서 발표가 계속되었다. 8월 1일, 10시에 그간 명분 없는 출두 요구에 반대해 온 이영섭, 신현봉, 노세현 신부가 원주에서 강제 연행되었다.
8월 12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윤보선 전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에 대한 선고 공판을 열었는데 박형규, 김동길, 지학순 피고인에게는 각각 징역 3년에 자격정지 5년을, 김찬국 피고인에게는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5) 전국 사제단의 탄생(誕生)
9월 24일, 원주에서 전국 3백여 명의 사제들이 모임을 갖은 후 정식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란 명칭의 사제단 결성을 합의하고, 인권 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날 저녁 사제단의 이름으로 원동 성당에서 기도회를 개최한 후 가두시위를 하였다. 9월 26일, 사제단이 출범한 후 처음으로 명동성당에서 ‘순교자 찬미 기도회’를 개최하고 ‘제 1 시국선언’을 발표하였으며, 기도회 후 명동에 진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신현봉 신부와 외국인 신부 1명이 연행되었다가 석방되었다.
6) 지 주교의 옥중서한
9월 11일, 지 주교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몸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 우리 한국의 현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아껴 주고 나의 소신과 주장에 동조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 여러 성직자, 친지, 그리고 원주교구의 나의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이 메시지를 보냅니다. 여러분께 나의 심경을 전해 드리고 또한 나의 감사의 정을 표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것입니다.’하면서 비엔나의 쾨니히 추기경, 마닐라의 대주교, 국내 성직자, 원주교구 교우, 주교단 등 사랑하는 벗들에게 〈옥중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9월 30일, 지 주교는 옥중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본인의 구속 사건에 대한 경위를 알리는 〈서한〉을 전달하였다. 10월 1일, 원주교구 평신도 일동이 ‘지학순 주교에 대한 기소는 정당한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배포하였다.
7) 지 주교의 최후 진술
10월 7일, 지 주교는 비상고등군법회의의 항소심 공판에서 양심에 의한 최후 진술을 피력하였는데, 이 〈진술서〉에서 지 주교는 ‘종교의 자유란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회정의를 발언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임을 강조하였다.
10월 9일, ‘화해와 쇄신을 위한 가톨릭 전국 성년대회’가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정에서 전국 14개 교구 국내외 성직자 5백여 명과 2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 후 사제와 신자들 1천여 명이 혜화동 로터리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였다.
10월 11일,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윤보선, 지학순, 강신옥 등 9명의 피고인에 대한 항소기각 판결을 내림으로써 긴급조치 1,2호가 선포된 지 9개월 동안 무려 203명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10월 30일, 원주교구 신자 일동이 ‘목자 잃은 양들이 주교단에 묻습니다’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였고, 11월 1일, 원동 성당에서 신자 4백여 명이 ‘구속자를 위한 특별미사’를 봉헌한 후 가두시위를 하였다.
8) 전국 교구의 기도회 개최
1974년은 지학순 주교의 구속으로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 이제까지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방관자적 입장에서 벗어나 구조적 악과 불의에 항거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 커다란 체험을 하는 한 해였다. 특히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주최로 개최된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서울 19회, 지방 44회에 이를 정도로 그 활동이 활발했던 한 해였다.
9) 지학순 주교의 석방
1975년 1월 1일, 원주교구 안승길 신부가 자신의 신변에 대한 탄압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종교인의 탄압에 대한 나의 양심선언’을 하였고, 1월 22일,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찬반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임, 불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발표하자 재야에서 반대의사를 표명한 가운데 1월 29일, 원주교구 사제단과 신자 3백여 명이 원동 성당에서 정 레오 신부의 집전으로 ‘지학순 주교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 해 2월 12일, 종교계와 재야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강행되었다. 2월 13일,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와 재야단체는 국민투표에 승복할 수 없는 가운데 2월 15일,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개헌논의 금지)와 4호(민청학련) 위반자 중 인혁당 사건 관련자 및 반공법 위반자를 제외한 전원을 석방한다고 발표함에 따라 이 날 김지하가 석방되고 2월 17일, 지학순 주교가 석방되었다. 이에 2월 18일, 전국 사제단은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환영하는 미사를 명동성당에서 가졌는데 지 주교는 이 미사 강론에서 ‘부도덕을 질책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2월 19일, 지 주교는 7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것을 포함하여 10개월만에 원주 역에 도착하여 인도에 도열한 신자 5천여 명을 비롯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원동 성당에 도착하여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마당으로 나와 환영식에 참석하였다.
5.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
이후 전국 사제단은 인혁당 사건, 동아일보 사태 등 언론탄압, 근로자들과 농민들의 권익 침해, 인권을 유린하는 고문,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의 추방, 각종 형태의 종교 탄압, 그리고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등 현실을 고발하면서 각종 기도회를 통하여 민주화와 인권회복운동을 계속하여 전개해 나갔다. 12월 12일, 원주교구는 인권주간을 맞아 원동 성당에서 봉헌된 특별미사에서 지 주교는 강론을 통해 ‘인권유린과 불의를 고발하고 규탄할 책임이 교회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1) 신현봉 신부 구속 사건
1976년 1월 1일, 원주의 신ㆍ구교 일치주간 행사에서는 ‘원주선언’이라는 선언문의 발표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거행되었는데 이 미사 후 천주교 사제와 재야 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이 낭독되었는데 이를 ‘명동 3.1기도회 사건’이라고 한다.
이 선언문에 서명한 사제 7명 가운데는 원주 봉산동 주임 신현봉 신부도 포함되어 있어 3월 3일, 신현봉 신부가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해 강제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므로 서 원주교구는 또 한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도 전국적으로 기도회를 개최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3월 24일, 지 주교의 주례로 봉산동 성당에서 ‘신 안당 신부님과 구속인사를 위한 특별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리고 10월 20일, 전국 사제단 모임이 학성동 주교관에서 있었다. 26일부터는 매주 월요일을 고통 중에 있는 사제 및 그 밖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치는 시간으로 정하여 원동 성당에서 기도 모임을 가졌고, 12월 6일, 원동 성당에서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1977년 이해에도 전국적인 기도회가 개최되었는데 원주에서는 J. O. C 주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가, 24일에는 교회일치주간을 맞이하여 ‘신ㆍ교구 합동 일치 기도회’가, 2월 17일에는 지 주교 출옥 2주년을 맞이하여 ‘구속자를 위한 특별기도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3월 14일, 5월 16일과 19일, 6월 13일과 27일, 원주에서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신현봉 신부는 1977년 3월 22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실형 언도를 받고 청주와 홍성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이 해 7월 17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2000여 명의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원동 성당에서 환영미사가 봉헌되었다.
2) 계속되는 기도회
신현봉 신부님이 석방된 후에도 원주에서도 10월 4일, 노동자를 위한 특별미사 12월 12일, 인권을 위한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1976년에 발생한 함평 고구마피해보상운동에 가톨릭농민회가 관여하면서 전국적인 기도회와 단식투쟁을 하는 등 정국이 어수선하였다.
1978년 6월 19일, 원동 성당 종탑에는 ‘김지하 시인을 석방하라’ ‘가톨릭농민회 간부를 석방하라’ ‘구속된 양심 인사를 석방하라’는 3개의 대형 현수막이 걸린 가운데 구속된 인사를 위한 특별기도회가 타교구 신부, 서울에서 온 개신교 목사, 문인, 교수, 해직 기자 등 다수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 주교와 30여 명의 사제들의 공동 집전으로 미사가 거행되었는데 강론은 함세웅 신부가 하였다. 참석자들은 미사 후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원동 성당 앞 가두에 나가 연좌하며 소리 놀이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이 해에는 인천 동일방직 노동조합 탄압사건에 개입한 J. O. C 회원과 개신교의 도시산업선교회를 빨갱이로 몰아가자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개입하게 되었고, 주교단도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주교구에서는 신부들에 대한 감시와 불법연금, 감금 등으로 인권 침해 및 종교활동 탄압이 심해질 뿐만 아니라 문규현 신부를 납치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같이 독재 정권은 종교까지도 탄압하기에 이르렀고, 1979년에 들어서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Y. H여공 농성사건, 부마(釜馬) 사태, 안동의 농민회원 오원춘 납치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지면서 유신철폐를 외치는 소리는 더욱 높아갔고, 반면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은 가속화되어 갔다.
특히 오원춘 사건으로 인한 경찰의 교회 탄압은 안동교구청 난입에 이르렀고, 전 교회 적인 저항은 거세게 불어 마치 천주교회와 유신정권과의 정면 대결에 이르는 상황까지로 발전하였다.
8월 6일, 김수환 추기경은 안동 기도회에서 강론을 통해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큰 이유는 그들이 민주주의를 해서가 아니라 바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진다’고 말하였는데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측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弑害)되므로 써 유신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3) 5.18 민중 항쟁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원주 출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에 취임하므로 써 유신시대가 마감되고, 민주화가 달성되는 듯 하였으나 12월 12일, 전두환ㆍ노태우를 비롯한 신 군부(新軍部)가 소위 12ㆍ12 군사반란을 일으키므로 써 실권을 잡았으며, 이들은 계획적으로 정권(政權)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대학가에는 자율화 바람이 불었고,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 3인은 소위 ‘서울의 봄’을 구가하며 당시의 정치적 패권(覇權)을 둘러싸고 분열하여 상호 경쟁적 대립관계를 형성하자 신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4월에 접어들어 노동 3권을 보장하라는 농성이 이어 졌고, 광산촌인 정선 사북에서 ‘사북사태(舍北事態)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14개 대학 교수 361명이 대학의 민주화가 시급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가운데 부산의 일부 노동자들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5월에 접어들어 전국적으로 노사분규가 확산되고, 교수들이 비상계엄 해제와 학원의 자유화를 요구하며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가 개헌공청회를 취소하자 대학생들도 도심에서 밤늦게까지 가두시위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16일, 총학생회장단은 가두 및 교내 시위를 중단하기로 결의하였으나 17일, 회의 도중 대다수가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5월 18일,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확대하여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김대중ㆍ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을 연행하자 광주에서 전남대생이 교문에서 투석전을 하며 가두시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19일, 이 시위는 광주시 전역에 확대되어 21일, 마침내 시위군중이 시내 전 공공건물과 시내 일원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22일, 목포, 나주 등 인접지역으로 시위가 확대되자 계엄사는 김대중이 학생시위를 배후 조정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하자 23일, 워컴 한미연합사령관이 연합사 소속 병력을 광주시위진압에 동원할 것에 동의하였으며, 27일에는 계엄군이 유혈진압으로 광주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민주화운동 과정을 광주 민중항쟁(光州 民衆抗爭)이라 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신 군부가 정권을 찬탈하고자 한 음모가 드러났다.
드디어 5월 31일, 신부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에 임명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6월 12일, 최규하 대통령은 내년 6월까지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한 후 8월 16일, 대통령을 사임하자 8월 21일, 국방부 전국주요지휘관 회의에서 차기 대통령에 전두환 위원장을 추대할 것을 결의하였고 8월 27일, 제 11대 대통령에 전두환이 당선되기에 이른다.
이 광주 민중항쟁으로 수많은 시민이 투옥되고 살해되었는데 이 사건은 6ㆍ25전쟁 이후 동족상잔(同族相殘)에 의해 저질러 진 아픔으로 남아 있다.
4) 최기식 신부 구속 사건
이같이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를 위한 항쟁(抗爭)이 일어나 수많은 시민들이 군인에 의해 목숨을 잃어 가는 동안에 원주에서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 사실이 차츰 알려지면서 각 교회에서는 광주사태의 회복을 위한 헌혈운동과 모금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기념행사가 원주에서 개최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5월 14일, 처음으로 원주교구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원동 성당에서 ‘광주사태 3주년 기념미사’를 약 500여 명의 시내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모여 봉헌한데서 비롯한다.
1982년 4월 5일, 뜻밖에도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사목국장 겸 교육원장)가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에 관련 구속되어 원주교구는 물론 전 가톨릭교회가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되었고, 원주는 전국 매스컴에 오르게 되었다.
최기식 신부 구속의 발단은 1982년 3월 18일, 부산 중구 대청동 소재 미국 문화원 방화(放火)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의 주동자가 고신대(高神大) 학생인 문부식, 김은숙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정부는 이들을 용공(容共), 좌경(左傾) 불순분자로 단정하고 전국에 지명 수배하게 되었다. 이들은 3월 28일, 지학순 주교를 만나 자신들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원주에 왔으나 마침 해외 출장 중이어서 최기식 신부를 만나게 되었고, 최 신부는 이들에게 자수를 권유하고 서울 한강 성당 주임 함세웅 신부와 자수 방법 등에 대해 의논하여 3월 31일, 자수하게 되었다.
한편 이미 광주사태 관련자로 수배 중이던 김현장이 1년 10개월 동안 최 신부의 보호로 교육원에 은신(隱身) 중이었는데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정부가 이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수배하자 최 신부와 함 신부는 정부와 협의하여 김현장을 광주사태의 수배자로써 자수 형식을 밟아 검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초 약속과는 달리 당국과 국내 언론들은 1주일 동안 가톨릭 교회를 불온 집단의 온상(溫床)으로 오해(誤解)되도록 유도하여 갔으며, 최 신부를 마치 방화의 배후 인물 또는 좌경 의식화 교육의 주관자로 부각(浮刻) 시켰고, 원주교구의 교육원이 마치 용공단체의 소굴인 양 몰아갔다.
최기식 신부는 1983년 8월 12일,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최 신부는 출옥 후 교도소에서 출감한 청년들의 삶의 터전인 ‘청년의 집’을 운영하는 한편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을 갖고, 무의탁 부랑아 및 장애인 수용시설 등 각종 복지시설 건립과 운영에 심혈을 기우려 오늘의 원주교구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80년대의 ‘4.13호헌 철폐 투쟁’ ‘6.10항쟁’ 등 원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비롯하여 각 시민단체 조직과 운영에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하게 된다.
드디어 1992년 12월 18일, 군사정권이 마감되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이래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권, 참여정부인 노무현 정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1993년 3월 12일, 참 사목자로서 교회의 쇄신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옥에 갇혀 신음하는 이들, 그리고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시던 지학순 주교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던 조국의 통일을 보시지 못한 채 선종 하신다.
6. 결어(結語)
원주교구의 정의평화운동은 곧 초대 교구장이신 지학순 주교의 정의평화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원주교구는 어려운 조건에서 설정되었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교구를 이끌어가야 했던 지 주교는 이 교회가 자립하는 교회, 평신도 중심의 교회 그리고 사회에 공헌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함을 동료 사제와 평신도들에게 설득하고, 자신과도 투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성모님께 의지하면서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제와 평신도의 의식을 고양하여 본당 운영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교구를 내실화 하여 사회 발전에 공헌할 수 있었다. 또한 교회의 대 사회적 역할을 인식시켜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으므로 교회가 지역 안에서 정신적 중심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대 정부와의 투쟁에 있어 교회 구성원에 대한 회유와 협박, 직장에서 불이익, 자녀들에 대한 피해 등 내부 분열에 가슴 아파하면서 이 모든 고난을 극복해만 했기 때문에 오늘의 원주교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주교구는 정신적 강인함을 통해서 사제와 평신도들이 합심하여 이 나라를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로 이끌어 내는 투쟁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이제 원주교구는 과거에만 안주할 수 없는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 다시 교구의 발전과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깊이 성찰해야 할 떼이다. 원주교구는 생동감 넘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고, 세계화 정보화해 가는 이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황폐화해 가는 청소년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것인가. 그리고 경제적으로 부(富)를 가진 자와 가난한 자가 양극화(兩極化)해 가는 과정에서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새로운 빈곤계층(貧困階層)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 새로운 사목방향을 제시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앞으로 원주교구는 늘 한국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예언자적 방향을 제시해 왔기 때문에 작지만 큰 교구로 거듭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늘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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