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이야기/듣고싶은 이야기

"꽃" 김춘수

하정초원 2008. 11. 21. 12:23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을 위한 서시

김 춘 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꽃을 위한 서시> 이해하기 ○

김춘수는 인식의 시인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이고 그의 언어는 인식을 위한 도구이다. 인식을 위한 도구로서의
언어가 담당하는 것은 사물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서 본질을 발견하고
잡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본질이란 의미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언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만으로는 잡아내지 못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다.
그리하여 그의 언어는 이미지 구성의 자료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럼으로써 언어가 언어의 자리를 떠나고 이미지가 언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감상하려 할 때는 언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집착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빚어진 이미지를 추구해 보아야 한다.

이 시는 '꽃'을 제재로 한 시 중에서 서시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12행 5연으로
구성된 산문체의 시이다.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명, 어둠, 미지 등의
시어는 릴케가 많이 사용하던 시어들로서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미지, 어둠, 무명이란 모두 사물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4연의 '울음이 금이 될 것'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역설이란 의미상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매체를 결합시킴으로써,
미묘한 내면의 울림을 드러내는 수사법이라 할 수 있다.
4연에서 슬픔, 고통을 의미하는 울음을 아름다움, 혹은 귀중함을 의미하는
금과 결합시키는 것은 의미상 상반되는 매체를 결합시켜서 비록 현상적으로는
고통스럽고 슬픈 것이지만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즉, 이 시는 사물에 내재해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인식하기 위해 고뇌하는 시인의 내면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꽃'은 사물에 내재해 있는 본질 혹은 본질적 의미로 해석된다.
나는 그것에 접근하여 해명하고자 하는 인식의 주체이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욕구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본질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가 사물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꽃)을 포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다. 사물의 본질은 언제나 완전한 인식의 가능성 저편에
있으며, 마치 영원히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와 같다.
이것이 대체로 정리해본 이 시의 철학적 의미이다.  출처-다음에서 검색